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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보석 같은 순간을 기억하라

- 영화 '맨해튼' 중에서 'He loves and she loves'

by 밤과 꿈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살아온 시간이 쌓일수록 그만큼 그 순간들이 늘어나겠지만 그에 비례해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순간의 기억들도 있기 마련이다.

사실 삶의 다양한 풍경은 대부분 잊히기 십상이다. 망각이라는 장치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무척 복잡하고도 심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망각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편 그리스 신화에서 언급한 망각의 강 레테가 저승에 있어 망자의 영혼이 레테의 물을 마시고 정화된다고 한다. 이때 망자는 생전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된다고.

신화시대로부터 근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망각에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보아 삶이라는 것이 간단치가 않기는 한 모양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크고 작은 고난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데다가 어쨌든 그 고난 속에서 단련받으면서 내성이 생겨 견디고 있을 뿐. 산다는 것이 그렇다.


무거운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서두에 잠시 언급한 것처럼 그렇고 그런, 스쳐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포착되어 마음에 이미지로서 각인된 순간을 말하고자 한다. 너무나 짧은, 짧아서 파편으로만 기억되는 삶의 풍경에 대하여.

작곡가 말러의 음악에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친숙한 선율이 자주 차용되고 있다. 그의 교향곡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민요와 동요의 선율과 렌틀러와 같은 춤곡이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 또한 말러의 뇌리에 각인된 어린 시절의 풍경이 작동한 것이리라.

나에게도 여태 빛을 잃지 않고 선명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어린 시절의 풍경이 있다. 자주 언급하는 것들이지만 집 담벼락에서 바라본 종달새의 비상, 그리고 뒷동네를 돌아 나오는 끝자락에 심긴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조우한 굴뚝새의 깊은 눈동자와 같은 것들이. 비록 너무 짧은 순간이지만 뚜렷하게 기억되는 풍경이다.

한편, 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첫사랑의 추억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순간으로 내 고백에 첫사랑의 그녀가 지었던 행복한 표정이 있다. 겉으로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라면서 짐짓 속내를 감추려 했지만 표정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순간이지만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프게 기억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혼을 앞두고 정리를 위해 찾은 신혼집에서 싱크대에 선 아내의 사랑스러운 뒷모습이 또한 아름답게 기억되는 순간이다.


영화에서도 이처럼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이른바 명장면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영화가 영상예술인만큼 헤아리기 어려운 명장면이 영화의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디 앨런이 감독하고 직접 출연한 영화 '맨해튼'의 한 장면을 기억한다. 아이작(우디 앨런 역)과 메리(다이앤 키튼 역)가 벤치에 앉아 퀸즈보로 다리를 바라보는 짧은 장면으로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찬가라든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과거에 나눴던 사랑에 대한 영화"(로저 애버트)라는 영화의 내용보다는 이 장면 만이 오롯이 기억에 남는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아름답다는 퀸즈보로 다리를 배경으로 한 야경도 아름답다는 생각과 함께 이 장면을 보는 마음이 푸근하다. 이때 흐르는 음악이 조지 거쉰의 'He loves and she loves'. 심포닉한 사운드가 재즈의 맛과 멋은 덜하지만 영화를 더욱 따뜻하게 한다.

돌이켜보면 영화 '맨해튼'의 이 장면과 같이 우리의 삶에도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삶은 그만큼 풍성해질 것이다. 우리가 삶의 보석 같은 순간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https://youtu.be/6ZzQ_kXmWAU?si=8nYAYXTYgME5PG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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