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살아가는 동안

- 이시영 시인의 짧은 시 '그네'

by 밤과 꿈

출석하는 교회의 젊은 여성 집사가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경과가 좋았다면 그 사실을 모른 채 지나갈 수도 있었다. 수술 중에 골반과 신장 가까이에 자라던 암세포가 급속도로 자라 그 부분을 수술하지 못한 채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부모 되는 장로님과 권사님께서 함께 봉사하는 성가대원 모두에게 중보기도를 요청, 알게 된 사실이다.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젊은 집사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을 줄곧 지켜보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사실을 전해 듣게 된 심정을 무어라고 말하기 어렵다. 플루트를 전공,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자신의 재능으로 다방면으로 교회에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연주회로 무대에 선 것이 오래지 않은데 젊은 나이에 이런 일을 겪게 되었다.

다들 성가대원 단톡방에 기도문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태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가 하는 말의 한계를 실감한다. 글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람의 많은 감정을 말이나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일단 논리적 사고로 걸러 정리하는 작업이기에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기에 충분하지가 않다.

젊은 나이에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엄중한 병마에 시달려야 한다는 사실이 먼저 안타깝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가대원들이 오랜 세월을 성가대에서 봉사해 왔기에(대부분 20~30년을 성가대원으로 있었고, 심지어는 활동기간이 50년에 가까운 대원도 있다) 성가대가 가족적인 유대로 이어져 모두의 안타까움이 예사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안타까운 마음이 아무리 크다한들 부모의 무너지는 마음에 비할 바는 아니지 싶다.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생명의 위기를 대면한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다.


작은 형님께서 급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 그 소식을 접한 어머니의 슬픔이 컸던지 발등에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고 한다. 심리적 스트레스를 못 이겨 모세혈관이 터진 까닭이다. 이를 생각하면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 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라는 신약 성경의 기록(누가복음 22: 44)이 실감된다. 자식을 앞세워 떠나보낸 어머니의 슬픔은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마음에 깊게 박힌 가시가 되었을 것이다.

인생의 슬프고 아픈 국면들 중에서도 죽음은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우선 죽음은 삶의 궁극적인 귀결이다. 그동안의 삶을 마감한다는 점에서 죽음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슬프고 아픈 국면이다. 한편으로 죽음은 슬프고 아팠던 삶의 국면들을 마감하게 한다. 기독교의 시각으로 보자면 죄에서 벗어나 비로소 안식에 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죄성은 간단하게 말할 내용은 아니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원죄로부터 자유로운 반면, 불교의 업과 마찬가지로 살면서 쌓아가는 죄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죽음과 직면하는 시간은 우리의 일생 중 가장 장엄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슬프고 아프지만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동안 꽉 붙들고 있던 자신을 비로소 내려놓는 시간이다. 하루의 수고를 끝내고 저무는 석양처럼 자신의 존재를 남은 사람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고 안식에 드는 시간이다.


당연하게 죽음은 삶과 연결되어 있다. 죽음은 삶의 연장이면서 완성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삶과 분리하여 생각한다. 죽음을 삶의 완성이 아니라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세를 믿는 신앙인에게 죽음은 새로운 출발이기도 하다.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한 생애의 종말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내가 한 젊은 집사가 맞이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쉽게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물론 젊은 집사의 고난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먼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는 성경의 말씀(로마서 10: 17)과 같이 먼저 젊은 집사와 그 가족이 겪고 있는 고난에 집중하고 싶다. 집중은 또 다른 형태의 기도라고 믿는다. 생의 장엄한 국면에 든 고난 앞에서 집착의 말을 쏟아내는 기도가 아니라 먼저 성경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

그것이 내가 가진 생사관이다. 죽음을 삶과 분리시키지 않고 연관 지어 생각할 때 바라보는 세상과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이 애틋하다.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현상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이 애틋하다. 그러나 절망적이지는 않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예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시영 시인의 시 '그네'는 내 생각처럼 만물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각이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이시영 시인의 시 '그네' 전문)


필생(畢生), 살아가는 동안을 뜻하는 말이다. 시인의 시에서와 같이 이 세상은 수많은 생명들의 필생이 얽혀 있다. 그 생명 현상이 장엄하다. 그리고 그 생명 현상이 극에 이르는 죽음은 실로 장엄하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동안의 역사가 죄다 아름답다. 지난 아픔과 이로 인한 상처까지도 아름답다. 언젠가 맞이할 끝날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믿음으로 매일을 살아간다.




이시영 시인(1949~ )
목요일 연재
이전 29화대도시의 두 얼굴, 낮과 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