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설경(雪景)은 항상 아름답다

- 청전(靑田) 이상범의 설경산수(雪景山水)

by 밤과 꿈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살다 보면 내리는 눈이 반갑지만은 않다. 반갑기는커녕 대설 예보에 걱정부터 앞선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든지 자가운전을 하든지 간에 눈이 쌓인 도시에서는 모두가 운신에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출퇴근 시에 엉금엉금 저속으로 다니는 차량 속에서 잔뜩 긴장한 가운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으로 붐비는 전철 속에서 파김치가 되기 일쑤다. 눈이 그친 후 기온까지 내려갈라치면 얼어붙는 길 때문에 그다음 날까지, 어쩌면 더 오래까지 불편을 걱정해야 된다. 설혹 기온이 올라 추위가 가시더라도 질척거리는 도로 사정이 도통 반가울 리가 없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아닐지라도 어지간한 규모의 도시라면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그만큼 자가용 차량의 보유가 보편화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눈길에서의 운전 부주의는 자칫 대형사고를 유발하기 때문에 다양한 안전 대책이 강구된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염화칼륨의 도로 살포일 것이다. 눈이 조금 많이 내릴 때마다 뿌려지는 염화칼륨 때문에 도로는 물론, 온 도시가 지저분해져서 마치 회색 물감을 덧칠한 듯하다.


이와 같은 현실과는 달리 기억에 각인된 순백의 산골 마을이 있다. 강원도 정선의 한촌(閑村)으로 교통이 발달된 요즘에 오지라고 할 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가옥이래야 두어 채 정도에 불과해서 눈이 많이 내릴 때는 한동안 고립을 피하지 못할 듯싶었다.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마을(마을이라고 하기도 궁색하지만)은 고즈넉했다. 인적은 느껴지지도 않았고 밭이었을 넓디넓은 벌판은 처녀지처럼 사람의 발길이 머문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어떻게 개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았을까 싶었다. 눈이 녹는 봄이 올 때까지 이 모습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비로소 떠오른 생각이지만 그곳이 겨울 한철 사람이 찾을 일이 없는 농막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촌이 아니라 농막이라고 내가 느꼈던 감흥이 달라질 리가 없다. 순백의 대지가 주었던 감흥은 오롯이 이십여 년을 마음에 살아있다.


그림 속 눈 덮인 겨울 풍경은 대부분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눈이 쌓인 산만큼 겨울의 아름다움과 위용을 잘 드러내는 풍경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창한 풍경이 아닌 소소한 풍경에서 더 감동을 받는다. 그 풍경에 우리의 일상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려 나뭇가지에 쌓인 야산의 등산로를 떠올리게 하는 오지호의 유화나 잔설이 남은 동네 골목길이 정겨운 강연균의 수채화가 주는 잔잔한 감동이 그렇다.

우리의 전통회화 가운데서는 청전(靑田) 이상범의 그림이 그렇다. 청전의 그림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소정(小亭) 변관식과 함께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으로부터 시작된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명맥을 현대에 이은 것이었다. 그러나 청전과 소정의 화풍은 사뭇 달랐다. 소정의 전성기(다작가이기도 했던 소정은 시기에 따라 화풍의 변화가 있었다) 그림이 수직 구도의 드라마틱한 화면을 구성한 것이었다면, 청전의 그림은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대하는 야트마한 마을 뒷산의 친근한 풍경이었다. 사람에 따라 선호도가 갈리겠지만 개인적으로 청전의 친근하고 따뜻한 그림을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박수근의 유화와 함께 우리의 소박한 정서를 꾸밈없이 전달한 그림으로 그 서정미를 사랑하고 있다.


오래전이지만 서울의 전통화랑 학고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청전의 설경을 넋을 놓고 감상한 적이 있었다. 서양화를 기준으로 할 때 2호 정도 크기의 소품이었지만, 오히려 소품이라서 정감이 크게 가는 그림이었다. 최근에 단시간에 집중해서 내렸던 폭설을 생각하다 청전의 설경을 떠올린다. 아래 '눈이 쌓인, 추운 겨울숲'이라는 제목의 그림에서는 모든 생명 활동이 치고 바람조차 잦아든 것 같은 풍경 속에서 오직 한 사람, 한촌에서 외로운 촌로일지도 모를 사람이 홀로 물지게를 지고 분주하다. 물지게를 지고 집으로 향하는 낮은 경사의 길과 뒷 야산의 능선이 화면의 우측에서 만나 정적인 화면에 동적인 활력을 주고 있다. 이에 여름이면 울창하여 집에 그늘을 드리웠을 나무 한 그루가 위치해 감상자의 시선을 제어하면서 균형을 잡고 있다. 그림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안정된 화면이 감동을 더한다.

화면의 구성으로 보아 이 또한 크지 않은 소품으로 겨울 한촌의 서정을 잘 묘사한 그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림이라서 현실 속 (내가 경험하는) 겨울과는 다르게 순백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아마도 이 그림이 존재하는 한 그 아름다움은 영원하리라.




청전 이상범(1897~1972)作, 寒林 着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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