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반 투르게네프의 중편소설 '첫사랑'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 그만큼 세월이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딛고 생(生)을 앞서 흐른다. '앞서'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은 재바르게 흐른다.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이 흐른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그 흐름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게 황혼을 눈앞에 둔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턱없이 적은 작금의 형편일지언정 조바심을 낼 일도 없다. 삶의 선택지가 적어서라기보다는 이때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중에는 자서전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돌이켜볼 때 자서전을 남길 만큼 특별하게 살아온 이력이라고는 별로 없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서전은 글로서 할 수 있는, 큰 의미가 없는 사치라고 생각한다. 자기 분야에서 남다른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면 사후에 평전이 나오지 않을까. 우리의 옛 선비들은 스스로 책을 엮어 세상에 내어 놓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후손들이 선대의 글을 모아 문집을 편찬하는 게 관례였다.
자서전이라는 필요가 아니라도 내 나이가 되면 자주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자신이 과거 지향형의 사람 이래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주의적 사고에 의한 행동이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현학적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사고나 생활이 단조로울 필요가 있다. 그 단조로움에서 비로소 삶의 여유를 찾게 된다. 지나친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오늘을 산다면 삶의 여유를 찾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삶의 여유를 가질수록 지나온 시간들을 조용히 반추하게 된다. 자기 분야에서 큰 것을 이루었다는 사람이 자서전을 꿈꾸는 심리와 다를 바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고 싶은 성정을 지녔는지, 아니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내향성을 지녔는지 라는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움이 시작되는 지점은 늘 우리에게 설렘이라는 감정을 선물한다. 하루가 기침하는 여명이 그렇고 한 해가 새로 시작하는 지금이 또한 그렇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의 정점에 있지만 마음은 벌써 봄빛에 물들어 한껏 설렘으로 벅차오른다. 신년이라는 단어가 가진 마력에 사로잡힌 우리는 비록 작심삼일로 끝날망정 설레는 감정을 동반한 새해의 설계로 제법 분주하다. 그만큼 처음이 주는 설렘이라는 선물이 대단하다. 많은 일을 겪고 살아온 시간 속에서 여전히 설렘을 마음에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면 우리의 생은 삭막한 황무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경험 중에서 가장 강렬한 설렘을 동반하는 순간으로는 첫사랑에 눈뜰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속에 갇혀 있는 순간 말이다.
첫사랑의 감정을 잘 포착한 소설로 투르게네프의 중편소설 '첫사랑'이 있다. 16살 소년에게 찾아온 첫사랑의 감정, 그 설렘을 투르게네프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예감, 이러한 기대는 나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것을 들이마셨고, 그 감정은 피 속까지 스며들어 모든 혈관을 따라 흘렀다......" (민음사, 이항재 譯)
그리고 소년은 첫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억제할 수 없는 힘이 나를 자꾸 그녀에게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는 매번 자신도 알 수 없는 행복의 전율을 느끼며 그녀의 방문턱을 넘어서곤 했다." (같은 책)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년의 감정을 자신의 경험으로 치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첫사랑의 경험을 기억하는 한 이 소설은, 투르게네프의 문장은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첫사랑의 감정은 휘몰아치다 멀어져 가는 돌풍처럼 씁쓸한 상흔을 남긴 채 사그라들게 마련이다. 소년이 짝사랑한 소녀는 소년의 아버지를 연모하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에게 남긴 편지에서 아버지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아, 여인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라......" (같은 책)
첫사랑의 경험만큼 강렬하지는 않더라도 지나온 시간 속에서 마주한 수많은 설렘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중에는 오랫동안 망각의 늪에서 잊혔던 순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첫사랑을 포함하여 지난 시간의 매 순간들이 아프다. 돌이켜보면 미숙한 대처가 아쉽고 아픈 순간일지라도 오히려 그래서 소중한 시간들이다. 지나간 시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이다. 아프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지나간 시간에 아픔이 많을수록 삶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소설 '첫사랑'에서, 투르게네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인생에 황혼의 그림자가 밀려오기 시작하는 지금,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봄날 아침의 뇌우에 대한 추억보다 더 신선하고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같은 책)처럼, 아픔 많았던 시간들이 소중하다. 모두 사랑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