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의 바다

by 그리움 나무

넓고 푸른 바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 문득 아버지가 우리 자식들을 생각했던 마음은 이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의 가르침이 때로는 한마디 말보다 더 강한 법이다. 엄마처럼 자질구레한 잔소리나 간섭은 없었지만 어떤 한 일을 계기로 아버지의 그림자가 참으로 컸구나 라는 생각! 내 관점으로만 생각하면 한없이 불만스럽고 원망스럽지만 그의 부재로 인해 생전에 느낄 수 없었던 그 깊고 넓었던 보이지 않던 의도가 느껴진다...


얼마 전 아버지가 별이 되셨다. 6개월간의 깊은 육체적, 정신적 흔적을 내게 남기고 떠나가셨다. 엄마는 3년 전에 가셔서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고아다. 중년의 고아! 두 분 다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시기 2개월쯤 전까지 딸인 나의 집에서 엄마는 20년 넘게 사셨고, 아버지는 이미 그런 엄마를 홀로 두고 자식들이 집을 떠나 하나 둘 서울 생활을 하고 있는 느 날인가 김삿갓 방랑생활을 이어가다 올해 3월부터 9월까지 리 집에서 생활하셨다. 내겐 선택 아닌 선택이 돼버렸던 것이다. 유는 우리 집이 있는 여주에 엄마가 추모공원에 계시고, 리 집이 아님 어느 형제의 집에서도 아버질 받아줄 수 없는 상황! 나는 엄마도 그렇게나 힘들게 보내드렸는데 아버지까지 못한다고 형제들에게 못을 박았다. 엄마가 2년간 투석하면서 힘겹게 사는 모습을 곁에서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두 부모님의 병시중을 하다가 지쳐버리기 싫었던 거였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C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형제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모셔갈 수 없어 눈만 껌뻑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대학 병원은 하나같이 장기 입원 불가였기 때문에 요양 병원이 아니면 형제들 집 중 한 곳으로 모셔야 할 처지였다. 철없는 아이처럼 아버지는 요양 병원은 싫다고 하셨고 우리 형제들은 묵시적으로 요양 병원을 차 선택이라 여기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던 기운 없고 수척해진 환자복 차림의 아버지가 그때만큼 가엾고 속상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남은 자식들이 한없이 비겁하고 옹졸해 보였다. 어찌 오갈 데 없는 부모를 이리도 나 몰라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때부터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얼 해드리나로 시작해서 그나마 체력이 남아도는 날은 아버지랑 유튜브 보면서 가벼운 스트레칭도 하고 오이팩도 얼굴에 해드리고 같이 이야기도 하다 저녁 8시가 넘어 파김치가 될 때까지 그야말로 내 생활은 없었다. 전에 엄마를 보낸 경험이 있어 아버지만큼은 잘 보내드리자 라는 생각이었다. 처음 두 달은 사기충천한 몸과 마음으로 대화도 즐겁고 생기 발랄했지만 석 달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내 체력과 정신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하루 대여섯 끼니를 챙긴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입맛이 까다롭고 고급지셔서 웬만한 반찬은 성차 하지 않으셨기에 매 끼니마다 진밥과 죽을 번갈아 하며 누룽지와 숭늉(많이 좋아하셨다), 신장에 무리를 주지 않는 한도의 반찬과 염도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나중에는 노이로제까지 걸릴 정도였다. 인터넷에서 오디와 검은깨가 좋다 해서 오디를 망에 걸러 짜서 즙을 짜 드리기도 하고 검은깨를 물에 씻어 일어 볶은 다음 믹서기에 갈아 그 가루를 반찬에 넣어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미 여섯 가지 처방을 받고 사이사이 치료와 입원을 위해 크고 작은 병원을 들락거려야 했다. 심장, 신장(콩팥), 전립선, 비염, 당뇨, 나중에는 구강암이 보태지고 시간이 지나 입맛을 더 잃으니 식이섬유 섭취가 원활하지 않자 변비에 소변도 잘 나오지 않아 온몸이 탱탱 붙기까지 했다. 약 봉지만도 커다란 바구니로 두 개나 되어 거실과 안방을 채우고 있었다. 화장실 가시면 화장실에, 거실에 계시면 거실에, 안방에 계시면 안방에 그 흔적을 꼭 남기셨다. 쓰다가 만 꼬깃한 화장지, 손으로 직접 짜 드린 오디 원액(틀니에 작은 씨가 걸려 잇몸이 아프셔서 그냥 못 드심), 물, 약은 기본이고 변이 잘 않나 와 간 밤에 본인이 관장을 하고는 화장실이고 방바닥, 침대 커버에 난장판을 만들어 놓으시곤 했다.


사실 아버지가 아프기 전엔 비교적 건강하게 사신 편이었다. 물론 오랜 지병인 당뇨가 있긴 했어도 평소 수영과 바둑, 등산 등으로 몸을 단련하셨던 터라 평생 그렇게 사실 것만 같아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이보다 좋을 순 없다며 황혼의 멋진 싱글 라이프를 즐기셨다. 그렇다고 사치스럽고 풍족한 삶이 아닌 궁핍하다 싶을 만치 소박하고 절제된 삶이셨다. 비좁은 방 한 칸에 남루하기 짝이 없는 세간살이, 자연에서 나온 식물로 생약을 달이신다며 찜솥이나 주전자, 대형 스테인리스 물통은 얼룩으로 더께가 잔뜩 앉은 반면, 아버지 옷차림과 자세만은 늘 단정하고 꼿꼿하셨다. 아마도 아버지 평생 환자들의 건강만을 생각하며 연구하셨던 생약 개발에 대한 원대한 꿈이 있어 그리 보이셨나 보다. 개발해서 몸소 본인이 먹어 차도를 살피고 몸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는 절차를 수도 없이 거쳤을 것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온다. 그때 당시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 대단하다 생각하기보다는 저런 외고집이니 엄마가 얼마나 사는 게 힘드셨을까, 그래서 내가 더욱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만 떠올렸다. 그러면서 남은 오빠들이 좀 더 부모님을 어찌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좀 더 많이 갖고 있지 못해 베풀지 못하는 내 현실이 야속했다.


이제야 그런 아버지가 때로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멍들면서 까지 여러 과정을 거치며 결국은 넘을 수 없는 세상의 제도적, 경제적 기득권 세력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을 한 개인으로서의 아픔이 느껴졌다. 연세 드시고 고정된 수입 없이 홀로 사시는 독거노인분들은 가장 시급한 게 건강 다음으로 경제적 부담인 것이다. 재산이 있다면 문제가 덜 되겠지만 아버지 같은 노인분들은 치명적일 수 있는 문제이다. 인생 말년에서야 매달 자식들이 조금씩 보태드리는 생활비와 나라에서 나오는 노인 연금으로 겨우 경제적 부담을 덜었다며 마음 편히 지내시는 모습에서 늘 어깨를 짓눌렀을 가장의 무게가 새삼 느껴졌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신랑, 아들, 딸, 남동생의 도움이 컸다. 그들이 없었다면 6개월 조차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간이 걱정스레 전해지는 진심 어린 따스함과 울적함을 달래주는 드라이브, 그 밖에 아버지나 내가 입맛이 없어 보이면 외식이나 배달 음식 등으로 대체해 주곤 했다. 물론 메뉴의 한계는 분명했으나, 그때 다시 느꼈다. 가장 힘들 때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진짜 내 가족이라는 사실을.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올라오신 며칠 전부터 나는 번역 일을 해오고 있던 중이었다. 무엇보다 번역이라는 일의 묘미는 어떤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그러려면 단순히 마감만 잘 지킨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 단어를 선택하기까지 짧게는 즉석에서, 길게는 몇 시간, 몇 날 며칠을 낑낑대며 나와의 싸움이 이어진다. 그게 나를 사로잡는 마력인 동시에 때로는 화나게도 한다. 해냈다고 느껴지는 순간의 그 짜릿함과 희열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판타지 그 자체였다. 또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다. 아! 사람은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아버지도 무면허 의사였지만 환자를 누구보다 알뜰히 살피고 죽을 뻔한 사람도 살려냈으며, 밤이고 새벽이고 환자가 있는 곳은 추우나 더우나 사시사철 달려가셨던 모습은 그야말로 '커다란 거인'이 따로 없었다. 이 허락하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 어쩜 이제야 내 삶을 찾았다 싶은 번역 일과 아버지가 끝까지 놓고 싶지 않으셨던 의사의 직분 사이에서 내 안에 아버지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하나는, 아버지는 결혼하면 안 되는 분이셨다는 사실! 가정 내 타협이란 걸 모르시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판단의 칼날이 분명하셨다 라는 점이다. 린 내가 보기에도 독재나 다름없는 일방적 살림법과 교육 분위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결혼은 혼자만의 삶이 아닌 것이다. 부부를 중심으로 자녀들과 더불어 교류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규모 소통 사회란 말이다.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존중과 배려, 이해와 사랑, 대화로써 감싸줄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가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상하 불평등 결혼 생활을 감행하셨다. 아버지의 직업은 시골에서 농사꾼의 삶이 아닌 무면허, 일명 돌팔이 의사였다. 이 말은 내 평생 가장 무거운 삶의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내 심장을 오그라뜨렸으며 내 머리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니 아버지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평생 고집하시며 빈곤 속에,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불안 속에 본인뿐 아니라 온 가족을 사지로 몰아넣으시기 일쑤였다.

물론 아버지의 의술은 소문이 날 정도로 뛰어나셔서 근방은 물론이요 서울 혹은 더 먼 아래 지방에서도 발품을 팔아가며 환자들이 찾아오곤 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해야 하는 친구들은 멋모르고 나를 부러워했다. 나는 정작 그 애들이 부러웠고만 나의 이런 속사정을 알리 만무였다. 그들의 집보다 우리 집이 더 부유하고 깨끗해 보이고 농사일을 거들지 않아도 되니 그렇게 비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집 살림은 그 애들보다 못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분들은 거저 내지는 외상으로 환자를 봐주는 게 다반사여서 엄마의 쌀 항아리에 쌀이 없다는 소릴 자주 들어야만 했으니까. 그때 깨달았다. 보이는 고통보다 보이지 않는 고통의 무게가 훨씬 더 크고 깊고 아리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열다섯에 집을 뛰쳐나온 가출 청소년이었다. 꿈이 있었고 공부가 간절히 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께 수도 없이 중학교까지 만이라도 보내달라고 애걸을 하셨단다. 하지만 그때마다 날아온 건 싸늘한 회초리 채뿐이었다고. 일제강점기 때 할아버지는 전남 광양의 공무원이셨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 하달 사항을 주민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일제 앞잡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급기야 광복을 맞이한 즈음에는 동네 주민들이 괭이며 삽을 들고 와 할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수모를 겪기도 하셨다고 한다. 한 개인의 아픔이자 한 나라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이 느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리라. 그때의 가장으로서 할아버지의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웠고 어떡하든 그 고비를 넘기려 야산으로 억새밭으로 몸을 숨기며 할머니가 할아버지 밥을 해서 몰래 머리에 이어 날랐다고 하신다. 그런 고초를 뼈저리게 겪으신 할아버지는 9남매 모두를 국민학교 까지만으로 못을 박으셨다. 본인처럼 배운 사람이 시대의 희생자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함자는 '글월 문, 이룰 성' 자이다. 글로써 이루려면 마땅히 공부를 해야 하는 데 그리 살고 싶고, 그리 살았어야 했는데 아버지 인생을 놓고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낳으셔서 이름을 붙여줄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시키려 해서 그렇게 이름 지으셨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운명이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생각이 미치기 까지가 아버지를 내 집에서 모시며 함께 지낸 6개월 사이의 변화된 내 모습이었다. 물론 그동안 아버지의 개인사를 몰랐다는 게 아니다. 최소한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 내 곁에 없다. 평생을 가난과 씨름하시면서도 본인이 그토록 열망하던 공부에 대한 열정을 자식들에게 쏟으셨고, 아낌없는 의사 정신으로 환자를 대하셨던 의로움은 어느 영웅 못지않으셨다. 우리보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헤아릴 줄 아셨고 함부로 속내를 들어내 놓고 가벼이 하시지도 않으셨다. 85세를 살아오시면서 항상 깨어있고 뭔가에 도전하려던 그 모습은 내가 닮고 싶기도 한 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좋은 점이 참 많으셨네..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전제를 깔면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이 없다. 여태껏 나는 처한 현실만 비판한 채 자기 연민과 번민에 빠져 허우적댔다. 아버지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이기적이다 싶을 만치 미숙한 면을 발견하고는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올리면 괜스레 화나고 슬프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 상대방 입장이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고집 불통, 방랑벽이 심한 사람! 딱 그렇게 단정 지어 버렸다. 그러니 나 자신은 그런 아버지를 둔 게 한없이 원망스럽고 형제들이 밉고 세상 모두가 싫었다. 가족이 싫으면 모르는 남이야 오죽하랴 라는 염세주의가 발동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교훈은 자기 기준의 정도를 판가름하는 잣대만을 들이밀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문제점이 보이면 눈높이를 조정하고 해결을 위한 의견을 조율하며 상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맞출 수 있는 자세가 진정 필요하다는 것을 엄마를 보내고 다시 아버지를 보내며 닫게 된 소중한 깨달음이다.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을 수용하고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을 채워나가려 힘써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다. 아버지 몫 이상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깨어있게 한다. 아마도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나 보다. 이제 아버지는 먼저 가신 엄마 곁에 계신다. 생전에 그토록 일방 통행적 사고와 행동으로 일관하셨지만 그것은 독단적 성격이었다고 치부하기보다는 그만큼 같은 눈높이로 대화할 수 있었던 노력과 기회의 부재 탓이었으리라. 부디 그곳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상대에게 귀 기울이며 서로에게 눈높이를 맞출 수 있으시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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