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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 Apr 10. 2024

9화  개들의 언어

가린의 쾌유를 빌며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아무도 없는 길을 저와 솔이 단둘이 걷고 있었죠. 

어두워가는 하늘가는 묽은 남빛이었고요. 하늘 가운데는 붉은빛이었어요. 붉은빛은 시나브로 남빛으로 변하고 남빛은 가로수 위에 내려앉고 있었어요. 서로 닮아가는 하늘색과 가로수 아래 우리도 남빛으로 물들어갔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작지만 또박또박한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어요. 

“안아주세요.”

저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어요. 거리엔 아무도 없었어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래를 보았어요. 제 다리 옆에서 솔이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우리는 눈이 마주쳤어요. 그 순간 또박또박 들리는 솔이의 말. 

“힘들어요. 안아주세요.”

저는 벙벙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방금 그 말, 네가 한 말이야?”

솔이는 꼼짝 않고 저를 쳐다보았는데 표정과 눈빛은 여전히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요. 안아주세요,라고.   

  

순간 강변 잔디밭에서 개가 말을 한다는 코코 엄마의 주장이 생각났어요. 물론 저도 개가 눈빛, 표정, 행동, 목소리로 몇 가지 언어를 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으르렁은 하지 말라는 언어. 

짖음은 불쾌하니까 하지 말라는 더 강한 언어.

낑낑거림은 불안하거나 도움이 필요하다는 언어. 

헥헥거림은 싸울 마음이 없음을 알리는 언어. 

하울링은 상황에 따라 다섯 가지 언어로 해석되는데 첫째는 습성, 둘째는 길을 잃은 동료를 위한 신호, 셋째는 영역을 지키기 위한 언어, 넷째는 분리 불안을 표현하는 언어, 다섯째는 통증을 표현하는 언어. 

이 외에도 개들이 행동으로 구사하는 비언어를 몇몇 가지 알고 있어요. 한 비숑 프리제는 강변 잔디밭에서 집에 가기 싫을 때 보호자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놓지 않아요. 보호자가 아무리 다리를 흔들어도 대롱대롱 매달리지요. 가끔은 바짓가랑이를 문 채 질질 끌려가기도 하고요. 한 초콜릿색 푸들은 집에 가고 싶을 때 보호자의 발등을 발로 긁어요. 한 크림색 푸들은 공놀이하고 싶을 때 두 발로 서서 보호자의 다리를 툭툭 치지요. 역시 공놀이가 하고 싶을 때 한 포메라니안은 보호자 앞에 서서 멍멍 짖어요. 빨리 공 던지라고요.

솔이가 구사하는 비언어는 대충 이래요. 혀로 손을 핥으면 “간식 줘요 혹은 밥 줘요”. 혀로 발을 핥으면 “산책가요”. 강변 잔디밭에서 저를 피해 다른 보호자에게로 가서 숨으면 “집에 가기 싫어요”. 화단 앞에서 가만히 서서 돌아다보면 “화단 안으로 들어갈 거니 리더줄을 풀어줘요”. 낑낑 소리를 내면 “똥 혹은 오줌이 급해요”. 그럴 땐 얼른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거나 자동차를 세운 뒤 풀밭으로 데려가지요. 솔이가 알아듣는 인간의 언어는 앉아, 손, 엎드려, 돌아, 뽀뽀, 안 돼, 가자, 기다려, 저기 코코다, 같은 간단한 단어들이지요. 

그런데 코코 엄마의 주장은 개의 언어 수준이 이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는 거예요. 간단한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는 정도가 아니고, 공 달라, 간식 달라, 산책 가자 조르는 정도가 아니고, 서너 살 아이와 대화하는 정도의 수준이라는 거예요. 솔직히 저는 그 주장을 믿기 어려웠어요. 

그날 강변 잔디밭에는 코코와 코코 엄마, 솔이와 저밖에 없었어요. 코코는 엄마 무르팍에 누워서 잠이 오는 눈을 까막까막하고 있었고, 코코 엄마는 코코의 과거 이야기를 펼쳐놓았지요. 한창 이야기에 빠져있을 때 코코가 엄마 손을 발로 툭툭 쳤어요. 코코 엄마가 코코에게 말했어요. 

“알았다, 알았다. 네 말 안 할게.”

그러고는 저에게 눈을 찡긋거렸어요.

“지 말 하지 말라고 이러는 거예요. 말을 싹 다 알아듣는다니까요. 완전 사람이에요, 사람.”

정말 그럴까, 하는 눈빛으로 저는 코코를 바라봤어요. 코코 엄마는 코코한테 약속한 바와 달리 코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지요. 그러자 코코의 표정이 살짝 변했어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코코가 엄마 손을 발로 또 툭툭 쳤어요. 코코 엄마가 말했어요.

“알았다, 알았다. 진짜로 안 할게. 이번엔 진짜다, 약속.”

코코 엄마가 코코의 발을 잡고 흔들었어요. 눈으로는 저를 보면서 말했어요.

“봤죠? 얘 표정 변하는 거. 사람으로 치면 세 살, 네 살쯤 되는 애기 같아요.” 

저는 긴가민가했어요. 살짝 변했던 코코의 표정이 정말로 엄마 말이 불편하다는 뜻인지, 코코가 엄마 손을 발로 툭툭 친 것이 정말로 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어쨌거나 약속대로 코코 엄마는 코코 이야기를 접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어요. 그동안 코코는 잠이 오는 눈을 감았다 떴다 까막댔어요. 우리가 헤어질 때까지 엄마 팔을 툭툭 치지도 않았고요.    

  

사방이 남빛으로 물들어가는 지금, 솔이가 말을 하고 있어요. 표정이 아니라, 눈빛이 아니라, 손짓, 발짓이 아니라, 혀로 핥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요. 

“정말 니가 말했어? 니 말이 환청처럼 들려.”

또 솔이가 말했어요. 

“힘들어요. 안아주세요.”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알았어, 알았어.”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자 솔이가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왼쪽 앞다리를 살짝 들었어요. 저는 솔이의 가슴을 두 손으로 감쌌고 솔이는 몸을 위로 솟구쳤어요. 그런 뒤 제 품에 안겨 제 왼팔 위에 두 앞발을 올리고 편안하게 몸을 쉬었어요. 세 걸음쯤 걸었나? 솔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혀로 제 입술을 살짝 핥았어요. 

“고맙습니다.”

또 들리는 인간의 언어.  컥, 웃음이 목에 걸렸어요. 저는 웃음을 가래처럼 캑캑 뱉어내며 이 상황의 부조리에 대해 생각했어요. 인간의 상식 너머에 있는 이 미지의 순간을 생각했어요. 인간의 언어와 개의 언어 사이 무너진 경계를 생각했어요. 낮이 완전히 저문 것도 아니고 밤이 완전히 온 것도 아닌 거리에서 마주한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감각이 오류를 일으켰을까요? 그러기엔 저의 정신이 너무 말짱했어요.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했고 너무도 명확했어요. 진짜 꿈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마법일까요? 보이지 않는 우주의 간섭이 개와 인간의 언어라는 선이 분명한 경계를 휘저은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아름답고 앙증맞은 마법입니다. 

슬며시 제 얼굴에 남빛 미소가 번집니다. 이 아름답고 앙증맞은 마법의 진위를 따져서 뭐 하나, 싶습니다. 그저 깨알을 깨물듯이 이 순간을 깨물고 고소한 맛을 음미하지, 싶습니다. 이 길을 마음속에 황홀경처럼 담아두지, 싶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걷습니다. 

길을 아낍니다. 

시간을 아낍니다. 

생각을 아낍니다. 

본 대로 들린 대로 느낀 대로 반짝반짝 눈을 뜬 기억 속에 간직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남편에게만 살짝 비밀을 털어놓았어요.

“있지, 솔이가 힘들다고 안아달라고, 말을 하더라.”

남편이 말했어요.

“개가 어떻게 말을 하냐?”

“하더라고.”

“니도 참.”

역시. 

저는 더 우기지 않습니다.     

 

며칠이 지난 일요일 오후였어요. 강변 잔디밭에서 신나게 뛰어논 솔이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죠. 솔이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저번과 똑같은 눈빛과 표정으로 솔이가 저를 올려다보았어요. 그 눈빛과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죠.

힘들어요. 안아주세요.

저는 큭 웃었어요. 그러나 그때처럼 인간의 언어는 들리지 않았어요. 그저 솔이의 눈빛과 표정이 전달하는 개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한 것이었지요.

“얘가 안아달래.”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솔이를 보더니 흠칫 놀랐어요. 

“진짜로 말을 하네~.”

남편의 귀에는 인간의 언어가 들린 걸까요? 

“야아, 저 눈빛하고 표정 봐라.”

아니네요. 마법은 또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쉽게도.     

 

그런데 말이에요….

개가 개의 언어를 몽땅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그런 개를 알게 되었어요. 이름은 가린, 베들링턴 테리어이고 두 살이에요. 

가린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근처 놀이터에 있을 때였어요.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솔이는 여기저기 냄새를 맡느라 여념이 없었고, 무료했던 저는 파란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과 놀이터와 무릎을 맞댄 주택들을 바라보았어요. 

그때 한 주택에서 한 여자가 알록달록한 천을 들고 나와 놀이터를 향해 탈탈 털기 시작했어요. 여자는 손으로는 천을 털면서 눈으로는 솔이를 바라보았어요. 아무도 없는 놀이터라 리더줄을 풀어주었던 저는 마음이 켕겼어요. 잠깐이면 들어가겠지, 하며 머뭇대는데 여자는 천 한 장을 털고 또 털었어요. 핏기 없이 푸석푸석한 얼굴은 무표정했고 솔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바스러질 듯이 메말랐어요. 안 되겠다, 묶어야겠다, 마음먹고 솔이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여자가 말을 던졌어요. 

“저 아이는 건강하지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어요. 어쩐지 생뚱맞게 들려서, 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퉁명하게 대답했어요. 

“네, 건강합니다.”

“건강하다니 참 좋네요.”

웃음기 없는 여자의 말이 젖은 빨래처럼 힘없이 축 처졌어요. 그러고는 말없이 천을 털다가 문득 생각난 듯 또 물었어요.

“몇 살이에요?”

“칠 개월이 막 지났어요.”

“아, 그렇구나~.”

한숨 같은 말이 바람에 날리는 꽃향기처럼 아스라했어요. 그때 솔이가 라일락 나무의 아래로 들어갔고 여자의 눈에서도 사라졌어요. 그러자 여자는 털던 천을 접어서 팔에 걸치고 난간 밖으로 몸을 쭉 내밀었어요. 라일락 나무줄기 냄새를 맡는 솔이를 보며 여자가 물었어요.

“무슨 냄새가 나니?”

보통 땐 솔이에게 누가 뭘 물으면 대신 제가 대답하곤 해요. 그런데 이번에는 솔이도 저도 침묵했어요. 솔이는 추상적인 언어로 대답할 수 없어서, 저는 라일락 나무줄기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 수 없어서. 

“우리 애는 병원에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말에 슬픔이 알록달록 배어 있었어요. 

“딸이 부산에 사는데 외롭다고 개를 입양했어요. 원룸에 혼자 둘 수 없으니까 댕댕이 유치원에 보냈는데 거기서 사람으로 치면 학폭을 당했다네요.”

“네? 학폭요?”

“네, 여러 마리가 우리 애 하나를 두고 폭력을 가했대요. 선생님이 방치했대요. 우리 애 이름이 가린인데, 가린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스트레스로 인해 간이 거의 다 망가졌대요. 병원에서는 안락사를 권하더라고요. 겨우 한 살인데….”

여자는 처음으로 솔이에게서 눈을 떼고 하늘 저 어딘가를 바라보았어요. 투명하고 파란 하늘이 햇살을 눈부시게 쏟아내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햇살은 여자에게 한 올도 가 닿지 않았어요. 반대편 기다란 건물이 검은 그림자로 여자를 덮고 있었지요. 

“겨우 한 살에, 행복하게 살려고 데려와 놓고 허무하게 보낼 순 없더라고요. 돈이 들어도 좋으니 치료해 달라고 했죠. 의사 선생님이 가린 보고 ‘너는 좋은 주인 만나서 좋겠다’ 하더라고요. 병원비만 딱 천만 원이 들었어요. 그 후로 약값이 한 달에 오십만 원이 들고요. 진료비는 따로고요.”

“약은 평생 먹어야 해요?”

“네, 평생 먹어야 한 대요. 아침에 한 알, 저녁에 한 알.”

“아이고, 어째요.”

“사실 나는 애가 죽을 줄 알았거든요. 퇴원해서 여기 데려다 놓고 석 달 동안 외출도 안 하고 돌봤어요. 죽기 전에 원 없이 해줄라고요. 그런데 살아났어요. 우리 가린이가 저기 창가에 앉아 여기 놀이터를 바라보면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기 좋아했어요. 아이들도 가린이가 저기 있다는 것을 알아서 여기에 오면 꼭 창가로 와서 인사했어요. 가린아, 가린아, 아이들이 부르면 가린인 좋다고 방충망을 긁었어요. 그래서 방충망이 저렇게 찢어진 거예요.”

여자가 처음으로 웃었어요. 여자의 웃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창에는 찢어진 방충망이 너덜너덜 붙어있었지요. 갑자기 여자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유, 어떡해! 우리 가린이… 지금 저기 있는 것 같네!”

웃음이 새처럼 날아가버린 여자의 얼굴에서 슬픔이 샘처럼 솟았어요. 

“퇴원하면, 가린일 저기 앉혀 놓을 거예요. 아이들이 하교해서 노는 모습을 보게.”

“간 때문에 지금도 병원에 있는 거예요?”

“그건 재작년부터 작년 봄까지 일이고요. 작년 여름에 슬개골 탈골로 수술을 했거든요. 퇴원해서 집에 데려왔는데 애가 시름시름 아픈 거예요. 슬개골 수술에 문제가 생겼나 해서 다시 병원에 갔죠. 검사를 해보니 슬개골 수술에는 문제가 없고 귓속에 곰팡이가 서식한다는 거예요. 수술 안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또 수술했죠. 지금은 그것 때문에 병원에 있어요. 재작년 하고 작년에 이어 올해도 병원에서 사는 거죠. 아마 병원비도 장난 아니게 나올 거예요. 하루 입원비가 이십만 원이니, 검사비에 수술비에 한 천오백만 원쯤 나올 것 같아요.”

여자는 한숨을 쉬었어요. 

“돈도 돈이지만, 한 살이 되기도 전에 간이 망가지고 슬개골 수술하고, 두 살이 되자마자 또 귀 수술을 해서 그런지, 지금 가린인 표정이 아예 없어요. 우리가 저를 버렸다고 생각하는지 우리가 가도 무표정이에요. 그 밝고 천진하던 표정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요? 동물병원이 부산에 있어서 날마다 가볼 수는 없고,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보러 가는데, 표정이 안 돌아와요. 지인들이 여기로 데리고 와서 날마다 들여다보는 게 더 낫지 않겠냐 해서 부산 동물병원에다 물어보니, 그러다 탈 나면 어떡할 거냐고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여자가 솔이를 보며 말했어요.

“얘를 보세요. 표정이 있잖아요. 말을 하잖아요. 우리 애도 저랬으면 좋겠어요.”

마침 솔이가 라일락 나무 아래서 나왔어요. 반짝이는 햇빛 속에서 털끝에 묻은 그늘을 파르르 털어냈어요. 풀 속에 코를 깊숙이 박고 초록색 냄새를 맡았어요. 숨을 깊숙이 들이켜서 땅속의 뿌리 냄새를 끌어올렸어요. 그러는 솔이의 입꼬리는 한껏 위로 올라가 있었지요. 

순간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잔잔하게 번졌어요. 마치 솔이의 입꼬리가 슬픔 가운데 조약돌을 던진 것 같았어요. 

그러나 곧 미소의 파동은 얼굴 가에서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졌어요.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어요. 넘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여자의 손이 쓱 닦았어요. 그런 뒤 바람에 눈물을 말리듯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어요. 오래오래.     

 

돌이켜보니 솔이도 언어를 잃어버린 때가 있었어요. 중성화 수술을 하고 난 뒤였지요. 

병실에서 나온 솔이를 향해 “솔이야”하고 나직하게 부르자, 솔이는 까만 두 눈으로 저를 보았어요. 순간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솔이의 두 눈은…

저를 보는데 저를 보지 않는 눈이었어요.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고 희망도 없고 절망조차 없는 눈이었어요. 

붙잡고 있던 감정의 끈을 다 놓아버리고 감정의 사금파리조차 남지 않은 눈이었어요.

저는 두 손을 가슴에 그러모았어요. 조마조마한 눈으로 안타깝게 솔이를 바라보았어요. 그렇게 바라보길 일 초, 이 초… 십 초, 십일 초… 텅 빈 솔이의 눈에서 서서히 감정의 끈이 하나 생겨났어요.

원망이었어요. 

그래도 저는 좋았어요. 서슬 퍼런 원망이라도 서리서리 쏟아내라고 응원하는 눈빛을 보냈어요.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눈빛으로 말했어요. 

솔이의 눈빛이 슬픔으로 바뀌었어요. 낑낑 소리 내어 울었어요. 저에게 오려고 네 발을 버둥거렸어요. 수의사가 솔이를 건네주었어요. 저는 솔이를 품에 안았어요. 그러자 솔이의 표정이 안도로 바뀌었어요. 

수술 결과를 듣기 위해 수의사와 마주 앉자 솔이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변했어요. 작은 얼굴을 어떻게든 숨겨보려고 제 가슴으로 파고들었어요. 저는 솔이를 꼭 그러안았어요. 가느다란 떨림으로 말하는 온몸의 언어가 제 가슴으로 파고들었어요. 

여기 싫어요… 무서워요… 집에 가고 싶어요….

그 뒤로 솔이는 동물병원에만 가면 두려움의 표정을 지었어요. 온몸의 떨림으로 그때 그 기억의 언어를 전달했어요. 트라우마로 남은 솔이의 병원 생활은 아홉 시간이었어요. 아마 그 시간이 솔이로선 생애 최초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거예요. 어쩌면 엄마 자궁에서 빠져나올 때보다도 더.     


그런데 가린은…  3년째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가린은… 아마 몹시, 몹시도 지쳤을 거예요. 너무도 지친 나머지 모든 감정의 조각들을 다 놓아버렸을 거예요. 

살기 위해서, 아니면 죽기 위해서. 

물론 처음에는 가린도 엄청난 감정의 물결을 느꼈겠죠. 뿌리 긴 바위 같은 두려움과 깊은 바닷속 같은 슬픔과 차디찬 얼음 같은 원망이 거친 파도가 되어 가린 안에서 출렁거렸을 거예요. 

그러다 검은 바윗돌 너머로 쏟아지는 울음 폭포를 지나 이윽고 아픔도, 슬픔도, 눈물도, 고뇌도 다 내려놓아 거울처럼 언어와 비언어를 반사해 버리는 손 시린 시퍼런 호수에 다다랐을 테지요. 웃음도, 사랑도, 행복도, 설렘도 다 반사시켜 버렸을 테지요. 염려도, 걱정도, 간절함도, 절절함도 거울의 속살로 파고 들어가지 못했을 테지요. 

수술에 수술, 또 수술의 시간들… 긴 투병의 시간들은 감정의 잔해들을 모아 투명한 얼음벽을 만들었을 테지요. 그래서 어떤 언어도 어떤 비언어도 차가운 호수의 심장에까지 가닿지 못했을 테지요.

그렇게 호수 아래 어둠 속에 홀로 침잠한 가린은 언어의 반쪽을 잃고 마침내 언어의 온 쪽을 잃어버렸을 거예요. 보름달이 사위듯이. 두려움의 언어, 슬픔의 언어, 원망의 언어뿐만 아니라 기쁨의 언어, 사랑의 언어, 행복의 언어도 모두.    

  

언제 다시 가린은 언어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 가린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꽃이 진 자리에 남긴 여문 씨앗에서 향기로운 감정의 꽃이 다채롭게 피어날 가린의 봄날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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