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주로 권위적인 시어머니가 아들이나 며느리에게 건네던 대사인데, 결혼 생활 이후 백만 번은 들은 듯싶다. 일주일에 두 번은 시어머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잠깐 시간 좀 내렴.”이라고 말씀하시면 나와 남편은 "네…"하고 방으로 따라 들어가 시어머니 앞에 앉는다. 그러면 시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을 이어 가신다.
“얘들아! 이젠 나를 믿지 말아라. 내가 몸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집안 살림도 못 하고 아이들도 못 돌 봐줄 것 같아. 미안하구나… 이 에미가 도움을 못 줘서… 너희들도 일하느라 바쁜데... 내가 집에서 반찬이라도 만들고 아이들도 돌 봐주면 너희 부부가 조금 편할 텐데… 내가 이렇게 아파서… 그걸... 못하니... 흑흑흑.....”
이야기 말미엔 반드시 닭 똥 같은 눈물을 흘리신다.
결혼 초기엔 이런 말을 들으면, 난 괜스레 시어머님께 미안해졌다.
‘어머님이 정말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우리 식구까지 같이 살게 돼서 더 악화되는 건 아닐까? 베이비시터이모님이 아이를 돌보고는 있지만 시어머님이 호의로 자꾸 베이비시터 분과 아이들 간식을 챙겨 주시려고 하는데 이것도 축적되면 노동인데… 큰일이네, 빨리 분가를 해야 되겠네. 아, 진짜 시아버님은 왜 합가를 하자고 해가지고... 베이비시터 월급에, 시어머님 용돈에, 나갈 건 다 지출되는데 여기저기 사방으로 눈치를 계속 봐야 하나…’
시어머님은 계속 우시고 남편과 나의 마음은 끝도 없이 불편하기만 했다. 갑자기 어디로 분가하기도 어려운 때라 정신적인 스트레스만 쌓여가는 형세였다. 할 말이 딱히 없어서,
“어머님, 저희가 병원 좀 알아볼까요?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 "혹은
“아이들 간식도 베이비시터 이모님에게 맡기시고, 어머니는 운동만 다니시는 게 어떨까요?”
정도로 제안을 하게 된다. 이 우울한 분위기를 깨고 싶어서 나온 급조된 대안이지만 시어머니는
" 흑흑흑... 너희가 이렇게 힘든데..."라며 울음으로 답을 하신다.
그런데 이런 음울한 환담이 매주 3회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니 내 입장에선 왜 저러시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혼 후에 우리 부부는 자영업을 시작해서 새벽 7시에 나가 밤 10시까지 일을 했다. 퇴근 후 집에 와 온몸이 소금에 푹 절여진 배추처럼 축 처져 있어도 예외는 없다.
어느 날, 그날도 온몸이 피곤해서 밥이고 뭐고 일찍 누워 자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나에게 오더니
“얘들아, 긴히 할 말이 있다…”라고 하시길래,
그날따라 그만 참지 못하고 내 분노가 폭발해 버렸다.
“어머니! 알아요! 또 나를 믿지 말라고 말씀하실 거잖아요? 맞죠? 어머니! 저희, 어머니 안 믿은 지 오래됐어요! 아이들은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보겠다! 어머님은 병원만 다니시고 집 앞 체육센터에 가서 운동하시고 집안일은 아예 하시지 말라 했잖아요? 누가 어머니를 믿는다고 자꾸 나를 믿지 말라고 하세요? 퇴근하고 현관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매일 그러시니 스트레스받아 죽겠어요! 누가 들으면 어머니가 매일 사경을 헤매는 줄 알겠어요!”
관자놀이가 간지럽길래 옆을 보니 시아버님과 남편이 어느새 왔는지 나를 째려보고 서 있다. 그러면 갑자기 시어머니는 더 큰 소리로 울면서,
“흑흑흑... 아니, 왜 그러냐? 나는 그냥 요즘 너희들이 바빠서 한 집 살면서도 대화가 없었던 것 같아 애들 어린이집 관련해서 뭣 좀 상의하려고 했는데… 흑흑흑 …”
어머니가 그렇게 우시면 시아버지는 날 나무라신다.
“아무리 시에미가 뭐라 한다고 그래도 며느리가 집에서 언성을 높이고 그러냐! 일단 아랫사람이 ‘네, 알았어요’ 하고 이야기를 풀어가야지! 어찌 시어머니 앞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냐?”
이때, 남편은 나의 손을 낚아채듯이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간다.
“놔! 이거! 어디 가려고?”
“... 일단 따라와!”
남편이 나의 손을 잡고, 끌고 나가려는 그 찰나에 시어머니가 우시다가 울음을 뚝 그치시고 살짝 얼굴이 환해지시는 것을 보았다.
‘내가 잘 못 본 거겠지.’
남편 손에 이끌려 온 곳은 아파트 앞 놀이터였다. 야심한 시각이라 텅 비어 있어 싸우기에 딱 좋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고…”
“아, 몰라! 어머니 왜 저래? 도대체 왜 또 저러냐고?”
“……그래서 내가 합가는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했잖아!”
남편의 목소리는 겨울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래, 맞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합가를 반대했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그냥 성격이 안 맞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작금의 이 상황이 단순히 성격 차이로 벌어진 일일까?
집에서 끌려 나오기 전에 남편의 어깨너머로 살짝 미소를 띠던 시모의 얼굴을 목격했다. 내가 시력이 안 좋아 잘 못 본 것일까...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니 에미다! 니 에미야! 넌 영원히 내편이야, 그렇지?'라고. 오늘도 시어머니는 기이하고 유치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이라고 난 확신한다. 여기는 시월드가 아니라 유치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