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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압구정! 압구정! 압구정!

압구정은 죄가 없다.

by 이봄

나는 결혼 후 10년간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합가 초기에 시어머니와 난 가끔 커피 전문점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시어머니의 우울감이 심각하다는 나의 판단 하에 가족 구성원과의 지속적인 소통이 시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외출해 커피를 마시며 소통의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내가 원한 건 일방적인 ‘듣기’가 아니라 양자 간의‘대화’였다. 하지만 늘 우리의 만남은 시어머니의 모노드라마로 끝이 나곤 했다. 최장 3시간 동안 시어머니의 이야기만 듣다가 어렵게 마련된 커피 데이트가 마무리된 적도 있었다.


시어머니는 일찍 홀로 되신 시할머니로부터 강압적이고 통제된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이후 결혼을 하셨는데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에게 소홀했고, 그 결과 마음의 병이 커졌다고 하셨다. 일련의 과정에서 생긴 ‘결핍’ 때문에 우울증(당시 내 견해)이 생긴 것 같아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부간의 데이트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 일방적인 소통은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항상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셨고. 나는 그 이야기를 수 백 번 들었다.


‘내 친구가 서울대 출신이고 모 대학 교수다.’

‘내 친구 아들이 유명 법무법인에 다니는 국제 변호사다.’

‘내 친구 아들이 이번에 서울대병원 외과 의사가 되었다’

‘신혼 생활은 압구정동 50평대 아파트에서 시작했고 가사 도우미가 있었는데 가난했던 그녀의 본가까지 시어머니가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압구정에 살 때 앞에 금강 쇼핑센터라고 있었는데..."

'압구정에 유명한 안과가 있는데...'

'압구정에 살 때 말이다...'

'장군이(남편)는 압구정동에서 유치원부터 다녀서...'

'압구정동에서는 과외를 꼭...'

'압구정동엔 의사, 고위 공무원 등이 살아서 학부모 모임에 나가면...'


간단하게 요약하면, 부잣집 딸로 태어나 자란, 대단한 인맥(?)의 소유자인 시어머니는 서울 모 대학을 나와 시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해서 압구정동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그런데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무능력했던 시아버지가 크게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나서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경기도까지 이사 오게 되었다는 구슬픈 이야기다.


난 압구정동 언저리에서 20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고 개인 창업도 그 동네에서 시작했지만 압구정동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이 없다. 그냥 교통이 아주 편리한 동네일 뿐이다. 아파트값이 높다고 동경하는 것도 없고 솔직히 부동산에는 관심이 없어 호기심도 없다. ‘라테는’ 강남은 다 밭이었고 강북에 위치한 '성북동'이 부촌이었다. 그리고 난 사대문 안에 살아서 압구정동에 대해 잘 몰랐다. 상전벽해, 지금이야 청담, 도곡, 대치동 등이 계란 노른자 땅이 돼, 거주 자체가 부의 상징이 되었지만 말이다. 30년 뒤엔 또 다른 동네가 새로운 부촌으로 뜨지 않을까? 근래에는 오히려 소수 집단의 욕망으로 일부 지역들이 의도적으로 띄워지는 느낌이다.




아무튼 ‘강남 바라기’ 시어머니의 압구정동 타령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어머니, 마이 묵었다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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