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우리 집에는 시부모님과 베이비시터 이모님, 아이 둘, 그리고 우리 부부가 살았다. 요즘 보기 힘든 대가족으로 10년 살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시아버지가 아이들을 키워줄 테니 같이 살자고 먼저 제안해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베이비시터 이모님은 일주일 내내 아이들을 돌보다 토요일 오후에 이모님 본가로 가서 쉬고 일요일에 업무 복귀하는 스케줄이었고. 그 당시 월급이 160만 원으로 시작해 2년 뒤에는 대략 200만 원까지 오른 것 같다. 이 당시 식당 매출이 상승곡선이라 감당할 수 있었지 남편 월급만으로는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시아버지가 은퇴를 했기 때문에 우리 아가들을 돌볼 수 있다고 해서 합가가 이루어졌는데 우린 결국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7화 참고)
가게가 너무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 집에 오면 난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못하고 바로 누웠다. 아이들은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돌보고 있으니 한 시간 정도는 누워 다리를 쿠션 위에 올려놓고 피로를 풀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잠깐 쉬고 거실로 나와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베란다 쪽으로 눈길이 갔다. 못 보던 짐들이 평소보다 많이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어머니가 택배를 받으셨나?’
야심한 시각이라 베란다 쪽은 어둑어둑했고 검은 비닐로 덮여 있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몸이 피곤해 그날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7시. 빨리 출근을 해야 했다. 남편도 이리저리 준비하느라 바쁘고 나도 베이비시터 이모님께 오늘 아가들 관련하여 부탁드릴 사항들을 메모하느라 정신없는 그때... 주방에서 문득 베란다 쪽을 보는데… 검은 비닐로 덮여 있는 짐들이 보였다. 마음이 급했지만 아무래도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저게 뭘까? 뭘 또 주문하신 걸까?
베란다문을 열고 검은 비닐을 들추었더니 그건 바로 ‘배추’였다.
어림잡아도 배추 50 포기… 하, 이게 여기 왜 있는 걸까?
시어머니는 허리 디스크로 아파서 통원 치료를 받고 있고 고통 속에서 매일 울고 계셨다. 난 하루 14~16시간 정도 일하는 관계로 김장을 못 한다. 우리는 그 당시 김장할 사람이 없는데 도대체 왜 배추가 여기 있는 걸까?
남편도 따라오더니 눈이 휘둥그레, 어느새 시어머니도 나타나셨다.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폭풍질문을 한다.
“엄마, 이게 뭐예요? 김장할 사람도 없는데 배추가 여기 왜 있어요?”
“… 저기 내 거 아냐. 누가 잠시 맡아 달래서…”
“… 누가요? 누가요?”
“저기… 교회 … 저기 집사님이…”
“…어느 집사님? 내가 연락해 볼 거예요…”
“… 저기 송 집사님… 있어. 오늘 찾으러 온대..”
맥락 없는, 신뢰할 수 없는 시어머니의 답변으로 이 배추의 소유주를 찾는 것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그때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방에서 나와 우리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시어머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베이비시터 이모님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한다. “저기… 아줌마,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요. 자리 좀 피해 주세요!” 다급한 시모의 목소리.
‘감 잡았다!’
“어머니, 혹시 이 배추 절이는 거랑, 양념하는 거 이모님한테 시키려고 했어요?”
“……”
“아, 진짜, 요즘 베이비시터 이모님은 김장하는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배추 절이다 이 이모님 관두면 어머니가 아기 돌보는 사람 구해 오실 거예요? 진짜 집에서 무슨 생각으로 사시는 거예요? 이모님은 김치 안 한다니까요! 애들 관련된 일만 한다니까요! 어머니! 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요? 아!... 악!... 꺅!”
“얘, 흥분하지 말아라. 이모 안 시켜. 내가 한다!”
“어머니가 뭘 해요? 디스크 때문에 물컵도 못 든다고 아버지한테 들어달라고 하는 분이 뭔 배추를 절여요?"
남편은 흥분한 나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려 하고 이모님은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 어머니는 또 “아, 어.. 지럽.. 구.. 나…아,” 하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시어머니에게
“엄마, 이거 당장 안 치우면 내가 다 버릴 거예요. 농담 아니니까 심각하게 들으세요.”라고 말했다.
그날 밤에 와보니 베란다의 배추들이 사라져 있었다.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내 방으로 오더니 고맙다고 음료수를 건네주신다.
“할머니가 친구분 불러서 배추를 싹 다 주셨어요. 그 친구분이 가족을 데려와 다 가져가더라고요. 어휴, 나한테 소금에 절여만 달라고 해서… 걱정이 되더구먼... 딸기 아빠 한 마디에 배추가 다 사라졌네요. 호호호”
'아들 말은 무섭나 보지...'
시어머니의 계략은 좌절됐지만 난 화가 가라앉지 않아 ‘노가리 주점’에 달려가 소주 한 병을 맥주잔에 부어 들이켰다. 이러다 알코올중독 치료 전문 병원에 가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