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얘, 난 평생 옷 한 벌 안 샀다. 네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을 늘 저축만 하고 생활비로 썼지. 자식들 대학까지 졸업시켜야 하는데 무슨 사치를 하니? 내 친구 중에 남편이 돈 잘 벌어 잘 사는 친구들한테 얻어 입거나 선물로 받아 입곤 했어. 그리고 화장품 있지… 그것도 다 교회분들한테 받은 거다. 그리고 다 샘플이야. 친구들이 샘플 주더라고 … 난 내 얼굴, 몸 치장하고 할 겨를이 없었다. 얘 근데 넌 너무 아무것도 안 바르더라? 립스틱 정도는 바르고 다녀야지.”
옷과 화장품에 별 관심 없는 며느리를 앞에 두고 긴 연설을 하셨다.
가끔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는 나는 한 때 사람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 사람을 뚫어져라 관찰하는 것은 아니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이것저것 보는 것을 즐겼다.
퇴근길. 지하철역 개찰구를 나와 ‘따뜻한 어묵 꼬치나 하나 먹고 가야지!’ 생각하고 천천히 이 사람 저 사람 구경하면서 역 내 어묵집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여자 노인 분이 양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낑낑거리며 개찰구에서 걸어 나오셨다.
‘아니? 저분은 시어머니?!’
지하철역에서 퇴근길에 가끔 우연히 만나기는 했다.
“어머니, 어디 다녀오셨어요?”라고 말을 거는데 시어머니는 연쇄살인범이라도 만난 것처럼 놀라셔서… 그 모습에 내가 더 놀랐다.
“어? 어! 에,에미야. 너 , 너 오늘은 퇴근 일찍 했구나…”
“네, 어머니, 뭐 사신 거예요? 제가 들어드릴까요?”
“아, 아니다.. 가벼워서…”
딱 봐도 새 옷이 잔뜩 들어 있고 무거워 보였다. 이 많은 걸 어디서 사서 들고 오신 건가? 집에서는 허리 디스크로 물컵도 못 드시는 분이 무거운 쇼핑백 들을 어디서부터 들고 오신 것인지…
“쇼핑하신 거예요?”
“아니… 저기…그러니까….”
“아니, 어머님. 필요하면 옷을 살 수도 있죠. 뭘 그렇게 숨겨요?”
“그러니까… 이게… 우리, 그, 있잖니? 송집사님! 그분이 같이 고속터미널 지하 옷상가를 가자고 해서 따라갔어. 근데 자꾸 싸니까 나도 몇 개 사라고 해서… 이거 하나에 오 천 원씩 하더라고”
“됐어요! 알았어요! 빨리 가요!”
난 시어머니의 쇼핑백 중 2개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도대체 몇 벌을 사신 거야?’
그날 저녁에 시아버지가 화가 잔뜩 나서 씩씩거리며 들어오셨다.
“아니, 뭐 이런 걸 심부름시키고 그래? 창피해서 죽겠네!”
난 시아버지가 들고 온 검은 비닐봉투를 건네받았다.
“이게 뭐예요?
“화장품 세트라나…아휴 무거워 죽는 줄 알았네. 나더러 화장품 가게에 맡겨 두었으니 가져오라고 전화를 했다.”
시어머니가 시아버지한테 전화를 해서 근처 화장품 가게에 구매한 물건을 맡겨 두었으니 오는 길에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장품 가게에서 검은색 비닐봉투를 쓴다고? 안을 보니 검은 비닐봉투 안에 종이 쇼핑백이 있었고 그 안에 여러 개의 화장품들이 보였다. 늘 말씀하시던 샘플은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시어머니가 사치를 하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말씀처럼 검소한 쪽도 아니었다. 특히 외모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잠자기 전에 얼굴에 바르시는 게 어찌나 많던지… 영양크림 같은 종류를 많이 발라서 밤마다 어머니의 얼굴은 늘 반짝반짝 빛이 났다. 샘플로 충당이 되겠는가?
누구나 자기 능력 안에서 필요한 항목에 지출을 할 수 있다.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나한테는 화장품 샘플만 사용하신다면서 도대체 왜 검은 비닐봉투 안에 화장품들을 숨겨서 오시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