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여자 아이와 5세 남자아이는 남매다. 엄마가 일 관계로 자주 출장을 다녀 외할머니 집에 장기간 얹혀 살 때가 많았다. 돌볼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외할머니 집에는 외삼촌(엄마의 남동생)과 숙모, 그리고 어린 사촌 2명이 함께 살았다. 모든 상황이 어색하고 불안했지만 애써 담담하게 즐기는 척하는 여자 아이는 연기하느라 하루가 고단했다.
낮에는 항상 외숙모와 사촌들 그리고 여자 아이와 그의 남동생만 남았다. 여자 아이는 매일 즐거운 척하느라 금방 지쳤다. '내가 여기서 잘 지내야 엄마도 안심할 거야!' 여자 아이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최대한 조심조심 걸으며 하루를 보냈다.
외숙모는 긴 머리에 아주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고 멋있는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미인형은 아니었지만 언듯 보면 화려한 외모였다. 그녀는 할머니랑 외삼촌이 있을 때는 여자 아이를 향해 웃었고, 그들이 나가버리면 갑자기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이유를 모르지만 늘 불안했다. ' 저 여자는 위험한 존재가 될 거야!' 여자 아이는 초조하기만 했다.
여자 아이는 하루 종일 밥하고 반찬만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맛있는 과일을 맛보고 나서는 늘 그것들을 갈구했다. '새콤 달콤한 포도와 사과를 먹고 싶어!' 그러나 그런 대단히 맛있는 과일들은 할머니가 있을 때만 먹을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을 때 미친 아이처럼 찾아도 없었다. 식탁에도, 그 어디에도... 여자 아이는 본능적으로 외숙모에게 이 과일에 대해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할머니나 외삼촌이 오면 어디선가 과일이 나타나니까.' 스스로 위로해 보았다.
어느 날,
여자 아이와 사촌 동생들은 그 큰 집에서 작은 공을 가지고 놀았다. 그런데 사촌이 놀면서 던진 공이 안방(외삼촌 부부의 방) 수납장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아휴, 쟤는 공을 왜 저렇게 던지냐?' 사촌에게 큰소리로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얹혀사는 기간에는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착하게 지내야 엄마가 안심하고 일에 전념할 수 있고 그래야 여자아이에게 맛있는 걸 사줄 수 있으니까.
수납장 밑으로 굴러 들어간 공을 찾기 위해 8세 여자 아이는 엎드려 그 밑을 눈으로 보면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수납장 아래에는 굴러 들어간 공과 함께 바구니가 있었고 그 바구니 안에는 그토록 여자 아이가 찾아 헤매던 반짝이는 보랏빛의 포도와 새빨간 사과가 담겨 있었다.
8세 여자 아이는 그곳을 샅샅이 훑어 눈으로사진을 찍었고 그녀의 작은 뇌의 어느 부분에 저장해 놓았다.
8세 여자 아이는 매우 놀랐지만 동시에 최대한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만 잡아서 몸을 일으킨 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촌에게 공을 던졌다.
'얘들아... 저 과일들은 너희들것이라 내가 손대면 큰일이 나나 봐.'
그 8세 여자 아이는 과거의'나'다. 난 그때 막연히 사람의 얼굴이 2개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가짜 얼굴과 그 이면에 가려진 진짜 얼굴. 비싸고 좋은 것을 그토록 숨기고 숨겨 그녀의 자녀들에게만 주고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나에게 웃음을 주며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상황에 따라 급격하는 달라지는 그녀의 여러 얼굴들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난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을 불신했고 결혼 이후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