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봄 Feb 26. 2024

35화: 며느리의 과거 (3)

"분노야, 안녕?"


(34화에 이어서)



"그러게 언니는 참 한심해..'


"누나도 참 멍청해, 이민도 잘 사는 나라를 가야지.. 어휴"


"애는 둘씩이나 데리고, 멍청한 거야? 순수한 거야?"


"애들은 한국말도 못 하니 바보처럼 보이잖아.. 하하하하... 야!  건물은 언제 지을래? 토지 확보했으니 또 건물 올려야지?"



여자 아이가 한국말을 처음으로 완벽히  알아 들었을 때 귀에 들어왔던 대화들이었다. 엄마가 부재 시, 엄마와 피를 나눈 친척들이 밖에서 무슨 잔치를 하면서, 80년대  부동산 경기를 타고 돈 맛 좀 본 그들이 떠들어 대던  한국어였다. 여자아이의 가족을 뒷담화하면서  역이민 할 정도로 망했다고, 여자 아이의 가족이 멍청하다고, 한국에서는 좋은 대학 가기는 글렀다고 얼마나 저주를 내리던지 여자아이는 숨을 죽이고 그 대사 하나하나를 다 암기해 버렸다. '저 사람들이 엄마와 나를  웃으면서 짓밟는구나.'


여자 아이는 의아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일이 잘 돼 부자로 살면  그들은 여자아이 양쪽 뺨에 뽀뽀를 해대며 '너무 예쁘다.'라고 말했고 엄마가 외국에서 강도로 전재산을 날리니 여자아이를 '짐짝'처럼 대했다. 그들은 엄마의 상황에 따라 여자 아이를 대하는 것이 달라졌다. 여자 아이가 가끔 흘깃 어보던 동화책이나 위인전의 내용과는 상반된 세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 아이는 억울했다. '난 잘못한 게 없는 게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왜 말로 날 공격하는지? 잘못을 해야 혼나는 게 맞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는데...'이 '억울함'은 '분노'라는 친구를 불러들여 여자 아이의 가슴 한편에 함께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자객을 써서라도 '복수'를 해야겠다는  무서운 상상을 하게 되었다.



 친척들은 끊임없이 성장해 첨탑을 쌓아 올렸고 여자 아이의 엄마는 남편 없이 세상 속에서 늘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동화책에서는  불쌍한 이에게 귀인도 나타나건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내가 사는 세상은 다르구나!' 여자 아이가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 집에 얹혀살던 여자아이는 이 사실을 엄마에게 말해줘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오랜만에 여자아이를 만난 엄마는 옷이며 학용품이며 필요한 것들을 잔뜩 사 왔다. 잠시 기분이 좋은 여자아이는


"엄마, ㅇㅇ들이 엄마 욕하고 나도 무시했어. 할머니는 듣고도 가만히 있었어... 할머니도 그들도 잘못한 거 맞지?"


"뭐라고?..."


엄마는  충혈된 눈을 크게 뜨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가 마당에 있던 계단을 타고 2층 장독대라 불리던 옥상으로 올라갔다. 2층 장독대에는 할머니가 담가놓은 장들이 있었는데  10개 정도의 항아리 안에 담겨 있었다.


여자 이의 엄마는 그 항아리를 하나하나 마당을 향해 던져 떨어뜨렸고 그것들은 산산조각이 나서 여기저기 개구리처럼 튀어 다니거나 족들에게까지 장들이 튀어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아니라  고추장과 된장을 품은 항아리들이 내려왔다.



엄마의 분노는 그렇게 표출되었지만 여자 아이의  그것은 그 항아리처럼 될까 봐 무서워 당분간 가슴속에 고이 모셔둘 뿐이었다





그때 '여자 아이'는 필자다.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경란아, 너 생각이 많아 보인다. 고민이 있니? 고민이 있을 때는 일기를 써서 그곳에 풀어봐. 그리고 책을 읽어봐. 재미있는 책들을 보다 보면 고민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네가 사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거든... 세상이 맘에 안 들면 다른 세상에 가보면 돼... 지구상에는 여러 세상이 있거든. 힘내렴."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이고 우주라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가르쳐주는 분야의 권위자는 선생님이 아닐까...


나는 그 권위자의 조언을 한 번 듣기로 했다. 내 안에 조커는 수면제를 먹여 재우기로 했다.


대신 그때 처음 만난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고 그만... 사랑에 빠졌다. 아,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있었단 말인가...




"조커야, 이 책 재미있어. 호호호"


"됐고... 난 언제 등판해?"

이전 04화 34화: 며느리의 과거(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