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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Sep 05. 2024

하얀 발자국


후미진 골목에 들어서자  

눈은 하얗게 세상을 덮고,  

온 세상이 하나의 색이라면  

하얀색이면 좋겠다  

다리 위 퍼런 멍도 전부 지워질 수 있는  

가장 새하얀 색으로


거꾸로 든 유리병에 맞은 다리를 이끌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도어록이 울리지 않도록  

구겨 신은 운동화와 검정 슬리퍼를 신고  

왜 그 골목으로 향했을까


저 멀리 보이는 파란 벽

다리와 닮은 색

홀린 듯 달려갔다  

눈이 하얗게 내렸는데  

왜 저곳만 파랄까


하나뿐인 발자국을 밟는다  

하나일까, 여러 명일까  

누군가 오래 걷고 또 걸었을 발자국  

떨리는 다리로 꾹꾹 발자국을 눌러본다  

이어폰을 꺼내 엉킨 줄을 푼다  

풀리지 않지만, 반대로 꽂아 넣는다


똑바른 것은 늘 불안하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으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시끄러운 락밴드를  

최대 볼륨으로 틀어야만 한다  

쇳소리가 걸음을 재촉한다  

눈발이 거세지기 전, 서두른다


새벽 사이 내린 눈은 옅은 빛에도 녹아버리고  

홈이 파인 곳엔 눈이 고였다  

익숙한 것들은 늘 비린 맛이 나서  

수학여행 때 부모님이 보고 싶다는 애들 틈에서  


나는 다른 이유로 울었다  

돌아가야 할 곳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  

사람들은 그 눈물에 박수를 보냈다


여름에도 긴팔 긴바지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햇빛 알레르기라며 거짓말을 했다  


유독 많이 맞은 다음날 아침이면  

어젯밤은 언제나 꿈처럼 느껴졌다  


냉장고를 자꾸 여닫는 것처럼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음으로 가득한 집을 떠올렸다


하얀 눈 아래 깨진 병이 있으면 어떡하지  

하얀 눈 아래 죽은 고양이가 있으면 어떡하지  

조심스레 발을 뻗어보려 하지만  

그 결심은 번번이 실패했다


누군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혼자 남은 길을 지우고,  

다른 발자국을 새기며  

파란 벽 앞에 서있다  


다리 위로 눈꽃이 내리고  

누군가 내 발자국을 지워간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덮이고 있었다


** 전에 써둔 단편 소설을 시의 형식으로 새롭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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