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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Sep 04. 2024

여름이 모두 가버리기 전에 산뜻한 글을 쓰고 싶었어.



가을이 오고 있다고들 말해. 나무를 올려다보면 군데군데 갈색 잎이 섞여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퍼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던데. 가을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조용히 다가오더라. 그 소리가 마치 나무가 제 몸 안에 남아 있던 물기를 덜어내려 애쓰는 것처럼 들려. 나도 언젠가 그 물기를 덜어낼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조금은 가벼워질까.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내가 느끼는 이건 아주 날카로운 건 아니야. 못 견디게 외롭거나 괴롭지는 않아. 그저 모든 것이 조금씩 멀어져 가는 듯한, 그런 고요한 순간들 속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지.


기껏 챙겨 온 소설집은 결국 한 글자도 읽지 못했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활자들이 희미하게 흩어지고, 그 안에 머무를 수가 없었지.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쓰러질 뻔했어. 실은 세 시간 전. 그즈음부터 몸이 조금씩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나를 아는 모두와 헤어지고 혼자 남아서야 비로소,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지. 발걸음이 흔들리고 금방이라도 버스 손잡이, 불이 켜지지 않는 신호등 같은 걸 쏟아낼 것 같았어. 나는, 알잖아, 흐트러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누구보다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어 해. 그래서 그 순간에도, 끝까지 나를 붙잡고 있었어.  


그런데도 혼자 남은 순간, 좁은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서 너저분하게 몸을 늘어뜨려버릴까 잠시 생각도 했어.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나서야, 그동안 쌓아왔던 무언가가 천천히 풀리는 느낌이었어. 순간적인 충동 같은 거였지.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엉망이 되고 말았어.  


그렇지만 그런 순간들에도, 어쩐지 나는 조용히 그 고요함 속에서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었어. 나의 불안과 피곤이 번갈아가며 나를 흔들지만, 이상하게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내가 있었던 것 같아. 그게 나를 버티게 만든 것일지도 몰라.  


몸은 여전히 가볍지 않고, 마음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흐트러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어.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장날 것 같은 절망이 느껴지진 않아. 그냥, 그저 이렇게 가라앉아 있는 채로 흘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가을이 오듯이, 나도 내 몸을 물기가 빠져나가듯 비워낼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쉽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어. 입가로 산뜻한 바람이 느껴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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