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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Oct 13. 2024

둘레길


 산의 맨꼭대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길의 끝에 서면 일시적으로 혼란스러워진다. 자율성이 사라져 버려서 어디로 첫걸음을 떼어야 할지 모르겠다.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산이 더 뾰족해질 수 없던 건 다리가 아팠기 때문인가. 하늘에 닿을 만큼 뾰족해져서 구름을 마구 찌르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런데, 꼭 하늘에 닿아야 하는 걸까 싶어서 이번에는 아주 깊게 파진 구덩이를 떠올려본다. 잘 못 발을 헛디뎠다가는 마치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까마득한 아래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깊이의 구멍. 우리가 아는 어떠한 것의 이름은 이미 굳어버린 채지만 늘 견고한 정의와 휘발성이 공존한다. 불리지 않으면 잊히기 쉬운 것. 아주 단단해서 오래오래 남아있을 것만 같은 것. 정상에는 나무를 두고 싶지 않다. 능선을 따라 억센 풀을 헤쳐 가고 싶다. 여러 표면의 마티에르를 느껴가면서, 영영 펼쳐지고 싶다. 물속에 살고 싶던 이유에 대해서 떠올려본 적 있다. 물과 공기가 만나는 경계에 반쯤 걸쳐서 양쪽 눈을 번갈아 떴다, 감았다. 떴다, 감았다. 그렇게 계속 움직인다는 걸 알고 싶었다. 물길을 찾기 전에는 우선 땅에 적응해 보기로 한다. 터벅터벅 모르는 길을 걸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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