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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Oct 28. 2024

낮에 숨긴 낯



유난히 맑은 햇빛이 마룻바닥을 따라 온 집을 서서히 채우며, 숨을 내쉬듯 사라지고 있다. 어제의 시간을 오늘이 덮고, 흔적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얇게 퍼진 채로.


 처음에는 사다리가 떠올랐다. 창고 한구석에 기대어 있는 사다리. 아무도 오르지 않지만, 여전히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과연 서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다리가 일자로 서있지는 않다. 비스듬히 서서 서로 지탱할 뿐이다. 사다리의 나무는 습기를 먹어 다소 눅눅해졌을 것이다. 조금씩 내려앉는 빛을 닮았다.


 거실로 들어서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걸려온 전화는 없는데도. 귀를 기울이자, 귓가에 뚜- 뚜- 하고 메아리치는 소리가 남았다. 오래된 기계음이 지지직거린다. 그 사이사이 희미한 숨소리 같은 기척이 끼어들었다. 아무에게서도 걸려오지 않는 전화기는 한구석에서 늘 같은 말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자리를 한참 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책장 맨 위 선반에 두었던 마트료시카를 생각해 냈다. 할머니가 먼 길을 다녀오시며 기념으로 사 온 것. 마트료시카, 마트료시카. 잘라 놓은 목재들 속에서 못생긴 얼굴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속에서 자꾸만 못난 것들이 기어 나온다. 뚜껑을 열 때마다 더 작고 단단한 눈코입이 제법 단호해 보인다. 모든 것이 작은 모양을 지났지만, 무겁고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점차 마루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사라지는 낮 속에서 사다리는 여전히 기대어 있었다. 누군가 올라섰을 때, 그건 중심을 잃고 조금씩 흔들릴 것이다.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한 번도 끝까지 열어본 적 없는, 마지막 인형을 생각한다. 가장 작은 얼굴은 언제나 잠긴 채로 남아 있었다. 누구보다 작고 단단해서 결코 닿을 수 없는 것. 마지막 껍질이 닫힌 채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싶다. 알지 못하는 비밀은 숨겨져 있는 편이 더 견딜만하다고. 껍질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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