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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Dec 09. 2024

단절면



 그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공기는 투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람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단지 안의 벤치는 잎사귀 그림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딘가 이상하게 무거운 공기였다.


 그여자는 오래된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하얀 원피스가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희고 가느다란 손끝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건이 있었다. 나는 눈을 좁혀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칼을 천천히 들었다가 내렸다. 들었다가, 내렸다. 그 동작은 기계처럼 일정했다. 칼끝이 흔들리며 작은 빛을 흩뿌릴 때마다, 나는 그녀의 손끝에서 무언가 잘려나가는 소리를 상상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 장면 자체가 무언가를 잘라내는 의식을 닮아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고 지나갔고, 개를 산책시키던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그녀를 못 본 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이 공간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그런 착각을 했다. 그녀는 나를 보는 듯했지만, 사실은 내 너머를 보고 있었다. 생기 없이 텅빈 눈, 무언가를 잃은 사람의 눈이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그날 밤 그녀의 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날아간 빛, 벤치 위에 떨어진 잎사귀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낸 조용한 단절감.


 며칠 뒤 그녀를 다시 보았을 때, 그녀는 벤치 옆에 놓인 작은 종이 묶음을 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잠깐 나를 보았다. 그리고 묶음을 내게 건넸다. 그것은 낡은 종이와 얇은 리본으로 묶인 작은 뭉치였다.


“이건 잘라낸 것들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햇빛 속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빛처럼 흩어졌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종이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조금 더 가벼워졌다.”


그날 처음으로 집 안의 오래된 상자를 꺼내 버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물건들, 끝나지 않은 계획들, 그리고 내 안의 오래된 이야기들까지.


햇살이 창가로 깊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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