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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신부수업

제3부: 나를 홀로 설 수 있게 만들어준 외할머니

by 최해주

단칸방에서 우리 세 식구는 겨울에도 서로의 온기로 버티며 살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엄마에게 가장 고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 해주를 위해 매일을 버텼다. 해주는 아직 ‘이혼’이라는 말을 정확히 몰랐지만, 아빠와 다시는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늘 함께 있었던 아빠가 없어 허전하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를 항상 괴롭히는 존재라 생각했고, 그런 아빠의 안부를 묻는 것조차 엄마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해주는 그저 주어진 하루를 엄마와 할머니 곁에서 묵묵히 지내왔다.

최해주 에세이

몇 해가 지나, 엄마는 해주의 학교 근처로 미용실을 옮겼다. 이전보다 훨씬 넓은 미용실이었다. 미용실 안에는 미닫이문으로 된 큰 방이 딸려 있었고, 다락방까지 있었다. 엄마는 새로 이사한 미용실을 보며 말했다.

“해주야 여기가 이제, 우리 세 식구가 살 집이야.”

“이제 할머니도 우리랑 여기서 같이 살 거야”

엄마는 설레는 마음으로 내게 말을 전했다.

미용실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단칸방에 있던 짐들도 모두 옮겨졌고, 다리가 아픈 할머니도 더 이상 버스에 오르락내리락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세 식구는 미용실 안의 작은 미닫이문안에서 보금자리를 틀게 되었다. 새로 이사한 동네는 작았지만 꽤 번화가였다. 미용실 바로 앞에는 큰 사거리가 위치해 있고, 사거리 앞쪽엔 수협은행과 수협 마트, 미용실 양 옆쪽엔 병원, 약국, 큰 가전제품, 꽃집 만화방까지 전라도 시골인데도 불구하고 초등학생 딸아이를 키우기에 너무 적합했다. 무엇보다 해주 초등학교를 가는 거리 중간쯤엔 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어서 까까머리 학생 손님들이 많았다. 덕분에 새로 이사한 미용실 덕분에 엄마는 밤늦게까지 일할 수 있었고, 세 모녀의 삶들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1년쯤 지나자, 밤마다 엄마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해주는 불안했다. 혹시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건 아닐까, 엄마도 아빠처럼 나를 버리는 건 아닐까, 온갖 생각들로 해주 머릿속은 항상 복잡하고 불안했다. 어느 날 밤, 해주는 엄마가 나가기 전까지 잠든 척을 하다 엄마가 나가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달려가 엄마에게 매달려 울기 시작했다.

“엄마!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순간 당황한 엄마는 해주에게 말했다.

“해주야 엄마가 몸이 너무 아파서 사우나에 거는 거야..”

“엄마 금방 다녀올게 할머니랑 자고 있어.”

하지만 해주는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울고불고 떼를 썼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 엄마도 늦었는지 할머니는 해주를 양손으로 꼭 잡은 채 엄마를 재빨리 내 보냈다. 해주는 늙은 할머니의 힘에 꼼짝달싹 못 했고, 화가 잔뜩 난 해주는 할머니가 밉다고 소리치며 미닫이 문을 양손으로 힘껏 잡아당기며 들어갔다. 그러자 할머니는 해주를 뒤 따라와 불러 앉혀놓고 결심한 듯 말하기 시작했다.

“해주 할미 말 잘 들어! ”

“내 새끼는 똑순이라 다 알아들을 겨!”

“실은 엄마가 사우나에서 일혀..”

“찜질방에 가면 바나나우유나 때수건 파는 아줌마들 있제?”

“엄마가 거서 계산도 하고 때수건도 팔고 하는 거여. ”

할머니의 말을 씩씩거리며 듣던 혜주가 입에 뿔이 달린 채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그면 엄마가 그 때미는 아줌마들처럼”

“옷도 홀딱 벗고 때도 밀고”

“바나나우유도 팔고 때수건도 팔고 그런다고?”

해주는 할머니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할머니는 해주의 머리와 손을 쓰다듬으며 다시 차근차근 얘기한다.

“옷 벗고 때를 밀어주고 하는 건 아닌디,”

“거서 음료수도 팔고 때수건도 팔고 계산도 하고 하는 거란 게.”

“엄마가 거기 가면 공짜로 뜨끈하게 허리도 지질 수 있고, 돈도 버는 거여~”

“근게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제 잡고 그런거제~“

“엄마가 지금은 꼭 돈을 많이 벌어야 된 게, ”

“해주는 할미랑 맛난 것도 먹고 기다리자! 알았제?

해주의 맘을 헤아리려 애쓰는 할머니의 말에 해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떼를 써도 엄마는 이제 저녁마다 꼭 나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엄마 허리는 항상 아팠던걸 아는지라 ,목욕탕에 가면 엄마가 공짜로 사우나에서 허리도 지질 수 있고, 꼭 필요한 돈도 벌 수 있다고 하니, 하나둘 마음속에 돋아난 가시를 뽑기 시작한다. 그날부터 해주는 엄마가 나갈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린다. 이전에는 늦은밤 할머니만 엄마를 항상 배웅했었지만, 이젠 해주도 엄마가 사우나에 출근하기 시작하면 할머니와 함께두 손을 흔들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엄마, 잘 갔다 와! 올 때 바나나우유 사 와야 돼!”

그리고 엄마가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쳐다보다 닭똥 같은 눈물을 꾹 참아본다.

(“내가 울면 엄마는 가지 못 할 거야.”)

(“내가 울면 할머니는 더 슬플 거야.”)

언제나 자신보다 할머니와 엄마의 마음을 더 헤아렸던 착한 11살 딸. 엄마에게 그 일은 정말 쉽지 않았던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명색이 멋쟁이 미용실 원장이 목욕탕에서 음료수를 판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자존심 상했을까. 그 시절, 이혼한 여자는 사회에서 큰 흠으로 여겨졌었다. 한창 일본에서 ‘집단 따돌림(いじめ)’라는 단어가 건너와 왕따라는 말이 막 퍼지며 유행하기 시작했었고, 초·중·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누군가를 따돌리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은근히 이야깃거리로 삼곤 했다. 그래서 엄마는 자신의 흠이 귀한 딸에게 번질까 봐 늘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아빠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빠는 무역 일을 하셔서 외국에 계신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나에게도 반복해서 들려줬다.

“해주야, 누가 물어보면 아빠는 외국에서 무역일 하신다고 해.”

나는 그 말이 사실이라 믿었다. 엄마의 남동생, 막내 외삼촌이 실제로 외국에서 무역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 말은 어린 나에겐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이 아빠 이야기를 물으면,

“우리 아빠는 외국에 있어서 가끔 한국에 와.”

그렇게 엄마는 나를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지켰다. 엄마는 나를 흠 하나 없는 아이로 보이게 하려 했다. 그건 결코 자랑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는 엄마만의 방식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몰랐다. 그 모든 반듯함이, 엄마가 세상과 나 사이에 세워놓은 보호막이었다는 걸.

엄마는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다. 밥을 먹으려 하면 손님이 들어오고, 한술 뜨려고 하면 손님이 계속 들이닥쳤다. 학생 손님들이 많았기에 학생들을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을 터, 그렇게 엄마는 끼니를 거르거나 기껏해야 2~3 숟갈을 먹는 게 전부였다. 그런 해주는 엄마를 보며 항상 안 쓰러워 했다. 혼자만 배불리 밥을 먹는 것조차 엄마에게 미안했다. 물론 할머니는 엄마가 밥을 먹지 못하는 날이면 함께 굶고 해주에게만 밥상을 챙겨 주곤 했었다.

어느 날 해주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김치찌개는 어떻게 끓여?”

할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해주 김치찌개 먹고 싶어? 할미가 맛나게 해 줄게!”

하지만 해주는 손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내가 끓여보고 싶은데..”

“엄마가 세상에서 김치찌개를 제일 좋아하잖아”

“할머니 시골 가고 엄마도 바쁘면 내가 나중에 끓여 주려고”

해주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할머니에게 말해본다.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다.

그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야뎌!”

“엄마가 바쁘면 해주 혼자 밥도 차려먹을 줄 알아야제.”

“옛날시대 같았으면, 벌써 밥도 해 먹고 시집도 가고 다 혔어”

“할미가 알려줄텐게, 잘 보고 배워야뎌!”

“가스불은 항시 조심하고, 알았제?”

그날부터였다. 할머니는 음식을 할 때마다 해주에게 알려주었고, 해주는 불과 초등학생4학년인데도 불구하고 요리들을 하나둘씩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김치찌개도 할머니 도움 없이 혼자서도 척척 끓일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하나둘 손님들 파마를 말고 잠시 쉴 틈이 생기면, 해주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정성스레 끓인 김치찌개와 밥을 한 대접 말아 엄마를 부엌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밥그릇을 든 채로 서서 크게 한술 떠, 호호 불어주며 엄마에게 먹여주곤 했다.

“엄마, 이거 세 번만 먹고 중화해.”

“밥 안 먹으면 할머니가 까라진다고 했어”

“엄마 쓰러지면 안되, 돈 많이 벌려면 밥 먹어야되!”

엄마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풀어보는 아이처럼 눈과 입을 환하게 웃으며 허겁지겁 받아 먹는다.

그런 할머니가 뒤에서 엄마와 해주를 세상 흐뭇한듯 바라보며 말한다.

“아이고, 내 새끼 저거 없었으면 어쩔뻔 했냐.”

할머니의 딸인 엄마가 웃으며 대답한다.

“엄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한 게 첫 번째 엄마딸로 태어난 거”

“두번째 내가 내 새끼 낳은거야.”

“엄마! 나, 내 새끼 진짜 잘 낳았지?”

“어떻게 저런게 나한테서 나왔나 몰라~”

그렇게 우리 여자 셋은 고단한 매일을 버티며, 작은 행복속에서 서로의 존재로 살아갔다.


그때는 몰랐다. 그저 엄마가 없는 밤이 무서웠고, 엄마가 나를 버릴까 봐 매 순간을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그 시절, 외할머니가 11살인 나에게 가르쳐준 건 단순한 살림이 아니었다.

밥심으로 세상을 버티는 법, 그리고 혼자서도 일어나는 법이었다. 엄마는 나를 위해 세상과 싸웠고, 할머니는 내게 지혜롭게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래서 나는 가끔 11살의 나를 떠올린다. 목욕의자를 딛고 올라가서 끓였던 엄마를 위한 김치찌개, 밤마다 눈물을 머금고 사우나를 가는 엄마를 배웅하던 장면, 그리고 나에게 늘 다정하게 말해 주었던 할머니의 나즈막하고 강한 목소리. 그 말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만든 문장이 아닐까 싶다.

“우리 강아지가 세상에서 제일 똑순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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