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서울에서, 나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해주는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가게 되었다.
엄마는 말했다.
“해주야, 이제 우리 서울 가서 살 거야.”
하지만 실제로 서울로 향한 사람은 해주 혼자였다. 미용실이 부동산에서 아직 나가지 않아, 엄마는 잠시만 이모네 집에 가 있으라 했다. 그날 아침, 짐을 싣는 낯선 아저씨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낯선 아저씨는 그날 처음 본 얼굴이 아니었다. 전에 한두 번쯤 엄마 친구라고 소개하고 같이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해주는 그 순간,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아저씨가 엄마의 그냥 ‘친구’가 아니라는 것도, 엄마가 그 아저씨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는 것도 그저 아무것도 느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차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고 엄마는 연신 해주에게 말을 걸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너무도 슬퍼 보였다. 운전하던 아저씨는 백미러로 해주를 힐끔힐끔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아저씨가 해주에게 말을 건다.
“해주는 좋겠네, 서울로 유학도가고.”
“해주는 유학 가는 거야, 다른 친구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
“엄마도 곧 간다니깐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해주와 친해지려고 하는 듯 아저씨는 계속 말을 걸었고 해주는 그런 아저씨가 상당히 불편했다. 차창 밖으로 논밭이 멀어지고, 빌딩이 하나둘 늘어났다. 엄마는 빨간 티코 속 앞 좌석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계속 울고 있었다. 들썩거리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그때 해주는 알았다.
(아, 이제 나는 진짜 혼자구나.)
(엄마가 만약 오더라도 정말 오래 걸리겠구나)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냥 웃으면서 이모네 집에 가야 되나?)
(아니면 안 간다고 울고 떼써 볼까?)
(휴게소에서 한번 도망쳐 볼까?)
해주는 떨리고 불안한 마음을 창밖을 보며 애써 달래 봤다. 비행기를 타고 온 것처럼 정말 짧은 시간 내에 서울 큰 이모네에 도착했다. 이모는 엄마와 아저씨에게 인사했고, 해주를 향해 말했다.
“아이고, 우리 여시 왔네~”하며 해주를 꼭 안아 주었다. 알고 보니 해주를 서울로 데려다주었던 그 아저씨는 해주가 생각했던 대로 엄마의 ‘친구’가 아니라 엄마의 남자친구였다. 밥을 먹으러 나가기 위해, 이모네 집에 간단히 짐을 풀고 엄마와 마지막 저녁식사를 함께 먹으러 갔다. 물론 엄마의 남자친구인 그 아저씨도 함께였다. 우리는 이모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고깃집으로 향했다. 포장마차 같은 고깃집에 도착했고, 그 아저씨는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지 고기를 열심히도 구웠다. 그런 엄마는 구워진 고기를 해주에게 연신 먹여줬다.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슬피 웃으며 말한다.
“이모 말씀 잘 듣고, 엄마는 금방 올게.”
“엄마랑 그때 같이 우리 둘이서 서울에서 살자”
해주가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말해본다.
“엄마도 그냥 이모네 집에 같이 있으면 안 돼?”
“할머니는? 할머니도 이제 우리랑 같이 안 살아?”
“나만 이모네 집에서 혼자 사는 거야?”
엄마가 눈물이 가득 고인채 웃으며 말한다.
“엄마는 미용실 나갈 때까지 돈 벌어야 해주랑 살 집 구하지”
“그러니깐 그때까지 돈 많이 벌어서 올게”
“그리고 할머니는 서울에서 같이 못 살아”
“할머니는 시골에서 혼자 산데.”
지금 이 장면은 해주가 종종 할머니와 함께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들이다.
날은 금세 저물었고 해주는 엄마와의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엄마와 서울 이모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곤 엄마는 아저씨와 함께 내려갔다. 그제야 해주는 깨달았다. 이제 진짜 혼자가 되었다는 걸, 할머니가 왜 어린 자신에게 그동안 열심히 음식을 가르쳐 줬는지, 엄마는 왜 아저씨와 함께 나를 데려다줬는지, 해주만의 상상으로 모든 퍼즐이 맞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해주의 상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었다. 그 시절, 뉴스에서는 ‘왕따’와 ‘자살 소동’ 이야기가 매일 흘러나왔다. 엄마는 혹시라도 해주가 서울에서 중학교 입학 시기를 놓쳐 적응을 못 할까 봐 늘 걱정했었다. 그래서 해주를 먼저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해주는 서울로 유학 가는 거야.”
“남들은 해외로 유학 가지만,”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 가는 것도 유학이나 마찬가지야”
“우리 해주는 나중에 크게 될 거니까, 서울로 가는 거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공부를 위한 유학이 아니라, 세상의 시선에서 딸을 잠시 떼어놓기 위한 엄마의 선택이었다. 해주가 살게 된 큰 이모네 집은 사실은 해주가 백일 때부터 자라온 곳이었다. 엄마가 일본으로 미용 유학을 가던 시절, 해주는 아기였고, 그때 큰 이모가 대신 해주를 길러주었다. 그 집에는 이미 초등학생 언니와 유치원생 오빠가 있었다. 이모는 늘 해주를 막내라고 생각하며 품에 안아주곤 했다. 이모말로는 해주가 아파도 꼭 새벽에만 아파서 열이 펄펄 끓었던 해주를 안고 이모부는 그 겨울에 맨발로 뛰어서 병원을 갔던 적도 있다고 한다. 이모부가 해주 널 그리 사랑했었고, 언니 오빠들보다 더 아꼈었다고 항상 말하곤 했었다.
이모부는 경상도 사람으로 아주 묵묵하고 과묵한데 해주는 이모가 그 말을 할 때마다 잘 믿지 못하였다.
언니와 오빠는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이모 속을 썩일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해주는 달랐다.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해주는 점점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고,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가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다. 이모는 그런 해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공부만 하고 이모 말이라면 고분고분 따르던 언니, 오빠와 달리 해주는 마치 망아지 같았으니까. 이모도 해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주라고 아무 일 없이 지냈겠는가? 식구가 아닌 이모네 식구들 틈에서 왜 눈치를 안 봤겠는가, 밥 한술 뜰 때도, 웃을 때도, 조심스러움이 먼저였다. 해주는 그저 엄마가 보고 싶었고, 그 마음이 점점 엉뚱한 모양으로 흘러갔다. 말이 거칠어지고, 표정이 굳어가며, 자꾸만 바깥으로만 눈이 향했다. 그게 해주가 세상과 겨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도 해주는 끝까지 버텼다. 비록 그 집의 공기 속에 완전히 섞이지 못했지만, 적어도 도망치지는 않았다. 물론 해주가 갈 곳은 서울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러던 해주는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좋은 집 안 살아도 돼.”
“그냥 엄마랑 살고 싶어.”
“나 이제 공부도 열심히 할게.”
“말도 잘 들을게.”
“엄마 그래서 대체 언제 와?”
“나 다 크면 올 거야?”
엄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늘 하던 대답을 반복했다.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해주랑 살집 여기에 구하고 있어”
“진짜 조금만 기다리면 곧 있으면 데리러 갈게”
엄마는 또 어린 해주에게 기약 없는 약속을 하였다. 그 말은 위로 같았지만, 해주는 그 속에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건지 상심에 빠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엄마가 드디어 해주를 데리러 왔다. 엄마는 미용실도 옮기고 해주와 함께 살 아파트도 얻었다. 해주는 꿈만 같았다. 그렇게 서울에서 다시 군산으로 내려온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해주까지 전처럼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어디 생각한 대로 다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해주에겐 더 큰 2차 사춘기가 오기 시작한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자식을 홀로 서울에 두고 온 엄마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을까.
나는 사실 내가 서울로 혼자 간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정밀 나 혼자서만 그렇게 서울로 가게 될 줄은.
그날 나는 생각했다.
(아, 엄마도 나를 버리는구나.)
(아빠도 떠났고,)
(이젠 할머니까지 나를 버리고 시골로 갔구나.) 그렇게만 생각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엄마가 나를 버리고 그 낯선 아저씨와 새로 결혼한다고만 생각했고, 사우나에서 일했다는 말도 어쩌면 그 아저씨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엄마가 내게 했던 거짓말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데려다주며 그 아저씨가 했던 말들.
“해주는 좋겠네, 서울로 유학도가고.”
“해주는 유학 가는 거야, 다른 친구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
“엄마도 곧 간다니깐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나는 매 순간 생각했다.
(엄마는 순 거짓말쟁이.)
(그 아저씨는 우리 엄마 뺏어간 도둑놈!)
나의 중학교 1학년의 첫 사춘기기가 그렇게 활짝 피어났다. 그리곤 날이 갈수록 나는 더 가시 많은 꽃으로 자랐다. 그렇게 매일 방황을 하면서도 엄마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나날이 갈수록 더 깊어져만 갔다. 어느덧 나는 성인이 되고, 세상 듬직하고 자상한 두 살 위의 남편을 만났다. 우린 오랜 시간 연애를 한 뒤 2014년도 해에 결혼하였다. 그리고 10년이란 시간들을 거쳐 아이 넷을 출산하게 되었다. 어렸을적 엄마의 사랑이 고팠던 나는, 아이들과의 애착이 더 남다르다. 나는 네 아이들을 키우면서 지금껏 힘들어도 단 한순간이라도 누구에게도 내 아이들을 맡기지 않았다. 그건 친정도 시댁도 예외는 아니였다. 사랑을 받지 못 했던 내 어릴적 시절을 보상하듯 나는 내 아이들 만큼은 유년시절 엄마와 함께 해야만 아이들 정서에 좋을꺼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나는 다섯 번째 소중한 생명을 또 품고 있다. 다섯 아이들과, 나의 끈끈한 모정은 앞으로도 쭈욱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