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인 Apr 20. 2024

한강에서 보내오는 밤편지

내 남편은 오늘 밤도 한강을 달립니다

주말에도 평일처럼 집 안에서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는 여자와 주말에는 늦잠을 자며 느긋한 휴식을 즐긴다던 남자가 만나서 십여 년을 살았습니다. 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하는 다소 예민한 여자와 어지간한 불결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았던 남자가 일상을 공유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겁니다.


다행히 남자는 여자의 촘촘한 요구들을 언제나 너그러이 흡수해 주었습니다.

"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한마디면 남자는 정말 변했습니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던데 이 남자는 결혼 이후 마치 나의 품에 스며들어 나에게 꼭 맞는 남자로 스스로 변해가는 듯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가스라이팅한 걸까요?


그렇다면 여자는요?

남자의 작은 변화들은 여자도 변하게 했습니다. 여자에게 남자의 변화는 배려이자 존중이었으니까요. 부부로 살아가기 위해, 오랫동안 부부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사랑을 여자는 까칠함으로 요구했고 남자는 넉넉하게 응해주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랑을 알기에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대화를 원하는지 알아갔고 그렇게 수많은 대화가 남자와 여자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만들어 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아내로서 어떤 사랑을 할 수 있는지, 남편에게 어떤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부부의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고 해야 옳은 듯합니다.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추태를 봐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런 우여곡절이 없었다면 조건을 뛰어넘는 부부의 사랑과 신뢰의 목표점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말 부부로 3년 차가 되자 이제 남편도 조금씩 힘이 든다고 하더군요. 첫 해는 아이 셋까지 모두 돌보면서 지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힘은 들었어도 마음은 더 나았다고 합니다. 그 후로 2년째 남편 홀로 서울 생활을 하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헛헛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하네요.


남편의 마음을 아내인 저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도 우리 부부와 가족을 위해 현재의 모습이 최선인 것을 우리 부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가장이고, 아빠이기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외로움도 견뎌내는 것이지요. 아내인 저 역시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은 최선을 다해 남편에게 선물 같은 시간을 주려고 합니다. 대단히 특별한 것을 요구하는 남자도 아니기에 함께 시간을 보내며 몇 끼의 집밥만 챙겨주는 것으로도 남편은 늘 감격합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 부부의 부동산 재테크의 소중한 결과물로 최근에 서울에 새 아파트 입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식구가 그 집에서 생활하게 되는 날을 꿈꾸었고 마침내 그 시간에 당도하였지만 인생은 예상과 다르게 진행되어 남편이 그 집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새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달라진 좋은 변화가 있습니다. 집이 회사와 아주 가까워 출퇴근 시간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사십 년에 가까운 자전거 인생을 자랑하는 남편이 매일 밤 한강 라이딩을 하며 헛헛한 마음 대신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는 시간이 생겼다는 겁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유독 한강의 야경이 돋보일 때 남편은 휴식하며 화려한 한강 야경 사진을 보내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주 간단한 메시지지만 저는 사진 한 장으로 남편의 마음을 읽습니다.


연장보다는 근육이 중요하다며 낡은 자전거를 타고 한강 라이드에 나서는 남편의 패기 어린 모습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합니다. 금요일마다 남편은 허벅지 근육이 왕창 올라오고 있다며 근육자랑을 몇 주째하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또 감탄합니다. "우와~ 청년 인로씨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환호해 주지요.


남편의 한강 라이딩은 상념에서 시작됐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달리고 또 달리는 그의 꾸준함이 참 남편스럽다 싶어 안도하게 됩니다. 상념의 끈을 부여잡고 사는 저와 남편은 참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상념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남편이에요. 남편과 살아서 가장 좋은 점이 바로 그의 이런 가벼움이랍니다. 상념이 똬리를 트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남자, 그저 일상을 데면데면 살아가지만 성실하게 살아내는 그의 삶의 태도가 아내인 저에게는 휴식이 됩니다.


하지만 사진을 보며 가끔은 남편의 깊은 상념을 마주할 때도 있습니다. 유독 멀리까지 달리고 또 달린 날, 심장이 세차게 뛰고 허벅지 근육이 뻐근해 오지만 그런 인내가 필요했던 그 시간들을 아내인 저는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제각각 세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살아내야 할 때, 뜨거운 햇살에 땀 흘리며 인내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아마도 남편의 라이딩은 그러저러한 일상을 견디는 그만의 분출구겠지요.


남편이 보내오는 밤편지는 달콤하지 않습니다. 서울의 화려한 불빛이 담긴 사진은 경북의 소도시에서 생활하는 제게 약간의 긴장감과 소외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할 때도 있습니다. 남편 대신 내 옆자리에서 잠이 든 막내아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날에는 공간에 대한 지남력이 상실된 것 같은 어색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알 수 없는 바로 그 단어 하나, '희망'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며 남편의 밤편지를 조금은 쓸쓸하게 받아 들곤 합니다.



그래도 쓸쓸함도 사랑인 이유는 이것이지요. 매 순간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하며 살고 있다는 것. 헤아리려고 무진 애쓰며 부부는 사랑을 합니다. 만족스러운 그 맞춰감의 과정을 지나 척하면 척인 관계로 오기까지 우리는 섬세하게 조율하며 살아온 듯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꽤나 만족할 만한 우리들의 만남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남편이나 아내인 나의 어떠함을 뛰어넘는 그저 신이 한 수였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신혼 초부터 지금껏 남편에 대한 변하지 않는 생각 하나가 있다면, 남편은 나에게 귀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그 고백이 남편에게는 어떠한 사랑 고백보다 진실한 고백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결혼에서 무엇을 희망하며, 남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남편은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나 짐작합니다. 까칠하고 싫증 잘 내는 내가 남편에게 싫증 내지 않고 그의 작은 언행에 감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결혼을 통한 나의 꿈은 이미 현실이 되었습니다. 신이 남편이라는 인생의 선물을 보내주었기 때문이지요. 내 삶에서 가장 감사의 이유입니다.





이전 13화 아직도 나는 그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