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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건 나에게 안부를 묻는 것

by 자유인

내 나이 마흔 넷이다.

나의 여러 성격 특성 중에 벗어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미리미리'를 외치며 사는 것이다.

무엇이든 조금 일찍 준비하고 꼼꼼하게 따져보며 사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어느 날, 알람 시계를 맞춰 두고 잠을 잤다.

긴장했던 탓인지 알람이 울리기 한참 전에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괴팍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는 소중한 신뢰의 대상이었는데, 신뢰에 금이 간 것 같았다.


대상(object)은 변한 것이 없다.

내가 변해서 모든 타자와 세상의 의미 배열이 틀어진 것 같은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낯설고 어색했다.


청소년들은 미성숙과 성숙의 과도기를 지나며 자아를 찾아가느라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다.

40대에 찾아온 왠지 낯설고 어색한 느낌은 조금씩 힘을 더하더니

큰 회오리가 되어버렸다. 이건 대체 무언가 싶다.


바로 얼마 전까지 나는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사람이었고

설정한 목표를 향한 돌진의 에너지를 자가발전시키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거기에 미리미리 준비하고 계획하며, 치밀하게 도전하는 성향은

나의 전반적인 삶의 모습과 참 잘 어울렸다.

그러니, 나란 사람은 내가 봐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매우 불편해졌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앞으로 이렇게 살 것인가?

자문해 보았을 때, 긍정하기 어려웠다.

나는 이것을 경고등이 켜진 것으로 인식했다.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해 보였다.


변화의 초점은 타인과의 관계도, 주변의 환경도 아닌 것 같았다.

타인도 환경도 어차피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나의 관점만 살짝 바꿔 주면 된다.

한 발짝 물러서서, 조금만 더 크게 바라보면 세상과 타자는 늘 아름답게 미화할 수 있다.

나는 미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긍정의 인간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초점이 온전히 '내'가 된 것이다. 난생처음이다.


삶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 되고

예전의 삶은 채찍을 들고 나를 닦달하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나를 닦달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내려놓지 않으면

어딘가 분명히 탈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내면의 익숙한 것들을 단 번에 훌훌 털고 새로운 버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들의 좋았던 점, 좀 나쁘더라도 내가 나를 인내해 주었던 모든 경험들이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것 같다.

내 모든 삶의 궤적들을 근거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뇌의 작동에,

더 이상 순종하기 싫다는 마흔넷의 반란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내야 하나?

완벽한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상황에 '나'는 어디서부터 새로워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기계가 아니고, 너무도 복잡한 한 인간인지라

자기를 돌보는 일은 우주를 돌보는 일처럼 복잡하다.


이 복잡한 난제 앞에서 나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예쁜 노트를 사서 일기를 써볼 수도 있고

컴퓨터에 폴더 하나를 만들어 날 것 그대로의 속내를 담아볼 수도 있으련만

타자를 의식한 글쓰기를 해보기로 했다.


자유롭게 휘갈겨도 본질을 드러낼 만큼

고매한 의식이나 대단한 필력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내 의식의 흐름대로 자유롭게 글을 쓰며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다.


필자가 되어 느끼는 해방감이 독자에게 닿아 미풍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벅찬 희망도 품어 보면서 말이다.


나는 글을 쓸 때, 내 인생에게 안부를 묻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한참 글을 써내려 가다 보면 익숙했던 시선들을 변경하게 될 때도 있다.

익숙한 것을 생경한 것으로 새롭게 바라 보면, 지난 경험은 새로운 실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빼꼼 드러낸 그것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예전에 미처 몰랐던 의미들을 가슴에 담으면

어지러워진 집안을 깨끗하게 정돈한 개운함이 든다.


이렇게 글을 쓰며

마흔넷, 인생의 전반전을 이제 정돈하고 다가올 후반전을 새롭게 살고 싶다.


나의 이 여정에 부디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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