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10년 후의 나 같은 건 아직 모르겠어요

내 인생 스포 금지(X)

by Taylogue

3년 정도 찬양하며 쓰던 모 사의 플래너가 있다. 그전까지는 다이어리만 써왔으니 내 첫 플래너이기도 하다.

모종의 이유로 불매를 하게 되며 매년 방랑객마냥 정착하지 못하고 수 백 개의 플래너를 스캔하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그 플래너를 쓴 첫 해에는 정말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다만 그 모종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결국 다른 제품으로 눈을 돌리고 말았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

플래너 내지에서 '절대 쓰지 않는' 파트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이후의 인생 계획라든지

향후 10년을 다시 1년 단위로 쪼갠 (마찬가지로) 인생 계획 같은 것들이 그랬는데


처음에야 다이어리가 아닌 '플래너'는 처음 써보는 거라 마냥 재밌기도 했고,

기필코 빽빽하게 다 채우고 말겠다며 에너지를 불태울 때라 어떻게든 다 채우긴 했다.


그런데 연말이 되어 1년 전에 세운 무려 인생 계획 (을 세운 당시 나는 너무 고작 23세...)을 돌아보니

놀랍게도 그 어느 부분도 맞지 않고 심지어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부분이 더 많았다.

이대로라면 내가 세웠던 1년 후, 2년 후, 3년 후, 4년 후, (중략) 20년 후, 30년 후 (후략)의 계획들은 모조리 다 실패하고

이번에야말로 나는 세기의 구제불능으로 거듭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물론, 23세에게 30대, 40대, 50대, 60대 이후라는 것은 너무 멀고도 먼 이야기라 거의 쥐어짜듯 채워 넣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애초에 계획대로 뭔가가 흘러갈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만,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너무 멀기만 한 미래에 대해 그럴듯하면서 일관된 계획을 세워 나가는 것이 나는 점점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매해 연말마다 별로 지켜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1년 후, 2년 후, 3년 후, 4년 후, (중략) 20년 후, 30년 후 (후략)의 계획들을 다시 살피며 현재의 나와의 괴리에 자괴감을 느껴야 하는 것은 덤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을 조금 변형해서,

나보다 계획이 더 컸다.



새 플래너로 갈아탄 이후에는, (나름) 과감하게 1년을 넘어서는 미래의 계획은 세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연말마다 연초에 세운 계획의 수행률을 점검하며


1. 상대적으로 지키기 쉬워 효능감을 줄 수 있는 계획 (나보다 작은 계획)

2. 약간 어려울 수 있지만 노력하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계획 (나만 한 계획)

3. 쉽게 지키기 어려운 계획 (나보다 큰 계획)


을 적절한 비율로 조절해 넣는 요령을 익혔다.


지난 13년간 100%를 달성한 해는 물론 한 번도 없었지만,

나보다 작은 계획과 나만 한 계획들이 안정적으로 약속된 성취감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나보다 큰 계획을 노려보며 다음 해를 계획할 수 있었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매년 세우는 10가지 계획의 1번 항목은 언제나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안 해 본 경험 10가지 이상 하기'로 13년째 고정되어 있다.


여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그 10가지 일들이 지난 13년간 내 인생을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꾸어 왔는 지를 안다면,

내게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40년 후의 계획을 세우라는 말 같은 건 아무도 할 수 없을 거다.



아니 제가 진짜 대답해드리고 싶은데요;

10년 후의 나 같은 건 아직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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