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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10.

당신의 나무.

by 방구석도인
요즘 나의 최애 장소. 소파.

스물다섯이었나, 여섯이었나. 그때의 나는 김영하의 소설을 참 좋아했다. 고독하고 우울하고 막막했던 청춘에게 김영하의 소설은 마치 고급스러운 향수 같았다. 그의 글을 읽는 동안은 침울한 현실이 고급스러운 고독과 우울로 세련되고 향기롭게 바뀌는 기분이었다. 물론 책장을 덮으면 다시금 칙칙한 현실뿐이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며 언젠가는 나도 해외여행을 꼭 가리라고 마음먹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주인공은 유럽의 미술관을 여행 다니는데 그 모습이 참 부러웠다. 소설 속 장면처럼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이성과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되고 싶다는 로망도 품었었다.


역시 그 소설이 김영하의 소설이었다. 사원과 나무뿌리가 얽혀 있다는 앙코르와트 이야기가 있던 그 소설. 그 글을 읽고 앙코르와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청춘 시절에 꿈꾸던 앙코르와트가 불현듯 생각 나 이번 겨울방학 여행지를 캄보디아로 정하게 되었다. 원래는 태국 치앙마이에 가려고 했었다.


김영하의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서 검색엔진 창에 "김영하 앙코르와트"라고 입력하니 '당신의 나무'라는 글이 검색되었다.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실린 단편소설이다. 처음 자취를 시작하며 책을 많이 버리고 이사했고 정리한 책에 김영하의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영하 책을 보면 이십 대의 우울과 방황이 생각나서 더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년인가 재작년에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다시 구입했다. 김영하의 그 세련되고 고독한 분위기와 섹시한 감성, 참신한 발상이 그리웠고 한편으로는 나의 이십 대가 그립기도 했기에. 이렇게 버린 책을 다시 구입하는 해프닝을 종종 벌인다.

당신의 나무, 김영하

당장 책장으로 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뽑아 들고 소파에 앉아 '당신의 나무'를 읽었다. 노란색 꽃무늬 쿠션에 등을 기댄 채, 고양이 모양의 쿠션 두 개를 무릎에 받치고 그 위에 책을 올렸다. 휴대폰에서는 재즈음악이 흘러나오고 소파 옆에는 따뜻한 보이차가 있다. 장스탠드의 노란색 불빛이 책을 비춘다. 이십 대의 나는 작고 어두운 방에서 찬 바람 들던 창가의 책상에 앉아 스탠드 불을 밝히고 책을 읽었지. 마흔네 살의 내가 홀로 캄보디아에 갈 줄 몰랐겠지. 침울한 현실이 싫어서 소설 속 세상으로 자꾸만 도피했었지.


소설 속 남자는 여자와 헤어지고 캄보디아에 가서 앙코르와트를 본다. 돌을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고 자란 거대한 나무를 보며 남자는 공포를 느낀다. 그 사원을 보며 남자는 여자를 생각한다. 여자는 자신의 삶에 파고들어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을 통째로 집어삼킨 나무 같은 존재라고. 그렇게 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 길을 지나던 승려의 "나무가 돌을 부수는가? 아니면 돌이 나무 가는 길을 막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생각이 전환된다. 승려는 말해 준다. 나무는 두 가지 일을 했다고. 하나는 뿌리로 불상과 사원을 부수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그 뿌리로 사원과 불상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도록 버텨주는 일이라고. 여기 돌은 부서지기 쉬운 사암이어서 이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흙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사람살이가 다 그렇지 않냐고. 남자는 혹시 자신이 그녀의 나무는 아니었을지, 누가 부처였고 누가 나무였는지를 생각하며 여자에게 전화를 걸고 앙코르를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나의 나무는 무엇일까?

나를 부수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도록 버텨주는, 나무.

나의 불상은 무엇일까?

나무의 길을 막는 그것.


당신에게 나는 나무입니까, 부처입니까?

당신의 나무는 무엇입니까?


열흘 뒤면 소설 '당신의 나무'의 주인공이 갔던 캄보디아 씨엠립에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보았던 사원과 나무뿌리를 나도 볼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거기서 답을 얻었지만, 나는 답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 불현듯 이십 대에 읽었던 소설 속 앙코르와트가 떠올랐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나는 사원과 나무뿌리가 하나로 얽혀 자란다는 그 광경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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