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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퀴 돌아 제자리.

울증 삽화의 시작?

by 방구석도인

폭주하던 생각이 멈추어 갑니다. 저를 설레게 하던 캄보디아 청년들과 씨엠립의 풍경들도 서서히 잊혀 갑니다. 캐나다를 향해 거의 일주일 간 달리던 생각들도 정지되어 갑니다. 방금 전, ECE(개나다 보육교사) 관련 과목 수강 신청 했던 것을 모두 취소했습니다. 알아보니 저처럼 교육학 학위가 있는 사람은 레벨 3 자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사실상 캐나다행은 비현실적인 생각이 맞는 듯합니다.


조증의 회오리가 지나가니 이제야 제정신이 듭니다. 당시에는 정말로 될 것 같았고,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지루한 이곳을 떠나 당장이라도 떠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떠나지 않는 것이 용기 없고 비겁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저는 그래도 병식(병증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다고 자신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저는 한국에서 이미 석사 학위도 두 개나 있고, 교사자격증도 7개나 있는데 왜 굳이 캐나다까지 가서 그 고생을 해야 할까요? 특수교사라면 지금 이미 근무 중인데, 왜 굳이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가서 특수교사가 하고 싶었던 걸까요? 40년 넘게 갈고닦은 한국어 실력을 놔두고 왜 굳이 머리 아프게 영어 공부를 하려고 했던 걸까요? 이미 갖추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왜 굳이 떠나려 했던 걸까요? 한국에서 이 모든 걸 갖추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말입니다.


이래서 조증이 무섭습니다.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일들이 마치 잘 될 것처럼 느껴집니다. 며칠의 시간을 낭비하고 상담료 15만 원을 낭비한 선에서 마무리된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몇 년 전에는, 갑자기 (장애아동) 치료실 차리는 것에 꽂혀서 실제로 사업장을 구하고 집기를 마련하는 것까지 진행하여 시간적, 금전적 손해를 꽤 보았습니다. 제가 만약 캐나다까지 떠났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니면 ECE 강의를 실제로 듣기라도 했다면 수십 만 원에서 백만 원 정도의 손해를 봤겠지요. 어쩌면 제가 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어서 이 정도에서 멈출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환우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조증 때 친 사고를 울증 때 수습한다.'라고 했습니다. 조증의 회오리가 지나갔으니 이제 울증의 회오리를 맞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ECE 강의는 취소했으니, 이제 마음을 다잡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 임용고시 준비에 매진해야겠습니다. 조증 때 붕 떠서 하지 못했던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지요. 밀린 빨래도 좀 하고요.


한편으로는 씁쓸합니다. 캐나다로 떠나는 것이 마치 영혼의 계시인 양 생생하게만 느껴졌는데, 이 지루한 삶의 돌파구가 되어 줄 줄 알았는데, 나의 구원이 되어 줄 줄 알았는데 그저 조증이었다니 허무할 뿐입니다. 조증과 '진실된 소망'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건지도 이젠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저는 되도록이면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게 해주고 싶은데,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이번 조증의 회오리를 통해서 깨달은 것도 있습니다. 저는 저의 집을 굉장히 사랑하고 아낍니다. 저의 책들, 차들, 찻잔들, 노트들, 만년필들, 예쁘고 귀여운 물건들을 많이 사랑합니다. 하지만 캐나다 떠나려고 생각해 보니 다 두고 가야 하는 것들이더라고요. 캐나다는 렌트비가 비싸 하우스렌트가 아닌 룸렌트도 지금 제 월세의 두 배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작은 방 한 칸에 가지고 갈 것은 제 몸과 옷가지 몇 벌 뿐입니다. 설사 큰 집으로 간다 하더라도 이사 비용이 더 들어 다 두고 가는 게 낫겠지요. 이렇게까지 수집하고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쁜 것들만 보면 갖고 싶은 충동들을 이제는 그만 따라다니려 합니다. 누가 아나요, 제가 정말로 캐나다에 가는 날이 올지.


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그토록 원하는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 캐나다의 석사학위, 캐나다의 교사자격증, 캐나다에서의 직업, 캐나다의 영주권, 캐나다의 연금, 캐나다의 취업비자'는 이미 제 손안에 쥐어져 있습니다. 캐나다를 대한민국으로 바꾸기만 하면 말이죠. 솔직히 의료보험은 대한민국이 더 낫습니다. 의료보험뿐인가요? 행정처리나 택배나 인터넷 등등 대한민국이 더 좋은 점도 굉장히 많지요. 캐나다가 대한민국보다 더 좋은 점 열 가지를 댈 수 있으면, 반대로 대한민국이 캐나다 보다 더 좋은 점 열 가지도 댈 수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이곳, 대한민국에서 잘 살아 보렵니다. 영어 공부가 정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고, 광활한 자연이 그리우면 여행 다니면 되는 거겠죠.


또 모르죠, 이러다 정말로 캐나다 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저를 잘 모르겠으니까요.

저도 저를 믿을 수 없으니까요.


약 먹고 잠이나 자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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