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열한 번째 날 그리고 마지막 밤의 기록(2025.1.23. 목.)
11박 13일. 모두들 길다고 했다. 2일 차에 칵테일 만들기를 진행해 준 가이드는 내 일정을 듣더니 "Too much."라고 했다. 프놈펜이나 태국을 들르지도 않고 오직 씨엠립에서만 11박을 머무는 내게 모두들 길다고 했다. 호스텔 스텝도 내게 오래 머문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나 빨리 마지막 날이 왔다. 모두들 내게 긴 여행이라 말했지만, 내게는 덧없이 짧게만 느껴졌다. 씨엠립을 아무리 사진에 담고, 마음에 담고, 눈에 담아도 부족하다. 더 머물고 싶다. 더 느끼고 싶다.
마지막 날의 일정은 앙코르와트에서 일출을 보고 앙코르톰, 바이욘사원, 코끼리테라스, 따프롬 사원을 보는 스몰투어와 ATV를 타고 보는 일몰이었다. 스몰투어는 한국어 가이드 민호와 함께 했다.
한 번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앙코르와트의 일출. 해뜨기 전 달과 별이 빛나는 어두운 하늘빛부터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빛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고 해 뜬 모습의 장엄함도 좋았다. 새벽은 제법 쌀쌀했고 핸드폰으로 플래시를 켜야 할 만큼 어두웠다. 여기저기 넘어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일출을 보고 나서 먹는 캄보디아 쌀국수는 정말 따스하고 맛깔났다. 강아지도 추운지 몸을 잔뜩 웅크려 거의 공이 되어버린 모습으로 꼬리에 코를 박은 채 자고 있었다.
앙코르와트는 힌두 신화를 표현한 섬세한 벽화로 유명하다. 가이드 민호가 들려주는 신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금은 어색하고 서툰 한국어로 들려주는 차분하고 단순한 말투가 참 좋았다. 쌍꺼풀이 짙은 그의 큰 눈도 좋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아기 원숭이가 민호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가슴팍에 매달렸다. 원숭이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려 손을 내밀자 원숭이가 내 손목의 팔찌를 잡아당겼다. 안된다고 몇 번 말하니 원숭이가 내게 이빨을 드러내서 섭섭했다. 민호 말로는 어제도 원숭이가 이렇게 매달렸다고 한다. 원숭이가 이틀씩이나 민호에게만 매달린다니 신기했다. 원숭이도 민호가 편안하고 좋은 걸까?
투어를 마치고는 민호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나는 제일 맛있다고 생각한 캄보디아 음식 피쉬아목을, 민호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록락을 시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내일은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고, 가기 싫다고 민호에게 말하자 오늘 밤에 같이 펍스트릿을 가자고 했다. 시간 약속을 정한 채, 헤어지고 나는 국립박물관으로 가서 원래는 사원에 있었다던 불상들을 보았다.
늦은 오후, ATV를 타러 가서 한국인 청년을 만났다. 내가 먼저 그에게 한국인이냐며 말을 걸었다. 나는 ATV 조작을 못해 캄보디아 가이드가 운전하는 뒤에 타고 한국인 청년과 한 팀이 되어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우리는 논 한가운데 바이크를 세우고 일몰을 보았다. 날이 흐려 조금 아쉬웠다. 출발 전 나는 한국인에게 미리 귀띔을 해 두었다, 맥주를 마시자고. 그가 가이드에게 맥주를 마시자고 하자 가이드가 구멍가게로 안내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이드는 32살인데, 돈이 없어서 아직 결혼을 못했다고 했다. 사장님이 착한데 일을 많이 시키고 돈은 조금 준다고 불평을 했다. 그런 사장님이 과연 착한 걸까? 사장님이 나쁜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노동자는 일 많이 하고 돈 적게 받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구멍가게 집 딸아이가 어린 동생을 안고 있었다. 내가 아기를 받아 안자 아기는 내 품에 얌전히 안겼다. 내 품에 착 안겨 있는 통통한 아기가 어찌나 예쁜지.
한국인 청년도 오늘이 씨엠립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고 했다. 나는 민호에게 양해를 구해 한국인 남성과 함께 민호를 만났다. 민호도 내가 코케 사원 갈 때 동행했던 가이드를 데리고 왔다. 둘은 막역한 사이라고 했다. 아직 한국 이름이 없는 그에게 나는 '재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우리 넷은 그날 밤, 한국어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씨엠립에서의 마지막 밤을 멋지게 장식했다.
여행에서의 만남은 일회적인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다. 여행지에서의 인연은 여행지에서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여행지를 떠나면 어떠한 접점도 없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는 여행이라는, 한국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대화가 가능하다. 아마 한국에서 만난다면 이 느낌이 아닐 것이다. 한국에 들어간 후 한국 청년에게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라고 카톡으로 인사하고 인연은 마무리되었다.
이번 우기에 또 씨엠립을 갈 것이고, 재석과 민호에게 여행 일정을 맡길 것이기에 그들과의 인연은 아직 진행 중이다. 나는 우리 셋의 단톡방을 만들었다. 7월 24일~8월 3일에 씨엠립을 방문할 거라고, 한국은 자살률 1위인 나라라고, 나도 이민 가고 싶다고, 재미없다고 그러니까 7월에 가면 재밌게 해달라고 했다. 좋은 곳 많이 보여 주고, 맛있는 것도 먹게 해 준다고 그들은 약속했다.
돈을 주고 만난 가이드라도 상관없다. 나는 그들과 함께 여행할 때 마음이 편안하고 든든했다. 어쩌면 내가 돈을 내는 고객이라 친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본 그들의 모습은 꾸며진 연극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여도 상관없다. 나는 외로우니까. 나는 친구가 필요하니까. 나는 캄보디아가 좋으니까. 씨엠립이 좋으니까. 그냥 그들에게 잘해주고 싶다.
내가 우기 때 다시 씨엠립에 가는 건, 어쩌면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여긴 눈이 많이 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