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을 진단받은 날, 의사 선생님은 저를 위로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도 이 병은 다른 병처럼 죽거나 하는 병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자살하지만 않으면 죽진 않아요. "라고 말씀하셨네요. 위로가 맞을까요? 사실 전 건강 하나는 자신 있었습니다. 2년 전, 건강검진에서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거든요, 체중이 과체중인 것만 빼면요. 하다못해 체내 비타민 수치까지 모두 정상 범주였습니다. 제 또래 사람들 중에는 벌써부터 혈압약을 복용한다거나 기타 다른 문제로 인해 정기적으로 약을 먹고 병원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저의 정신 건강이 정상범주를 벗어나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정체성에 혼란이 옵니다. 정상인인 줄 알고 살았던 지난 43년의 삶이 알고 봤더니 조울증 환자의 삶이었던 거예요. 제가 친구가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손절을 자주 해서 그런데요, 저는 내향인이다 보니 표현을 못하고 끙끙 앓다가 조용히 손절을 해요. 저를 아프게 하고, 저를 화나게 하는 타인의 말과 행동을 차곡차곡 쌓고 꾹꾹 눌러 담다가 제 마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였을 때 관계를 일방적으로 정리합니다. 그런데 조울증 진단을 받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그 사람이 이상했던 게 아니라 내가 이상했던 건 아닐까? 약을 복용하니 타인에 대해 화가 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타인의 언행에 대해 마음이 덜 아픈 것 같기도 합니다. 혹시 저의 조울증 때문에 좋은 사람들을 제가 제 발로 떠나온 건 아닐까요? 제가 정상인 줄 알고 제가 옳은 건 줄 알고 43년이나 살아왔는데 말이죠, 이미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는데 말이죠. 제가 조울증이라서 과대망상으로 현실과 세상과 사람을 왜곡하며 지내진 않았을까요?
의사 선생님은 이 병의 치료 목적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삶의 질이 향상된 듯합니다. 왜냐면 제가 원하던 제가 되어가고 있거든요. 약을 잘 먹으니 '흥분하지 않고 천천히 우아하게 말하기, 적당히 먹기, 절제된 음주, 너무 증오하거나 너무 집착하지 않기'가 저도 모르게 저절로 실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다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누군가에게는 어금니 꽉 깨물고 두 주먹 불끈 쥔 채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노력 없이 저절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허탈합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하네요. 약 몇 알로 쉽게 해결될 일인 줄 알았으면 진작 먹었지 말입니다. 그런데 공부는 여전히 하기 싫고 집중이 잘 안 돼요. 아무래도 ADHD약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자살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살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하늘은 어쩌면 그렇게 광활할 수 있으며, 태양은 어쩌면 그리도 온갖 아름다운 식물들을 잘도 키워 낼까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빛을 보세요.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달과 별을 보세요. 너무 아릅답지 않나요? 나무에서 어쩌면 그리도 달콤하고 향기로운 열매가 열릴 수 있을까요. 온갖 동물들은 생긴 것이나 하는 짓이 어쩜 그리도 귀여운가요. 이렇게 아름답고 경이롭게 생생히 살아있는 이 세상을 제가 어찌 저버릴 수 있겠어요? 인간의 위대함은 또 어떻고요. 위대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적을 저는 그렇게 쉽게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