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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하의 소중함

by sommeil


'아보하'란 아주 보통의 하루를 말한다.

젊은 시절에는 아보하가 당연한 줄 알았다.

누구나 부모가 있고 가정이 있고

화목한 일상이 디폴트(default)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일상이 무너지고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무탈한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96년에 태국에 와서 가장 놀랐던 일이 있었다.

당시 우리 동네가 갑자기 비가 많이 오더니 정전이

됐었다. 지금 기억에 2시간 남짓 꽤 오랫동안 정전이 되어서 에어컨이 작동을 안 하니 더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에 우리 집은 남편이 일하는 사무실과 같은 건물이어서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덥다고 언제 전기가 들어오냐고 뭐라 할

텐데 직원들은 아무 말 없이 모든 문을 열고

비가 오는 바깥을 그냥 바라만 보고 각자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구도 어떠한 불평도 없이.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전기가 들어오니 사무실 불도 들어오고 반가운 에어컨도 작동이 되었다.

직원 중 하나는 아무 말 없이 창문과 문을 닫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또 한 번은 꽤 최근의 일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저녁 시간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끄러운 소리는 어느 곳 하나

들리지 않았다. 30분 정도 지나니 다시 불이 들어오고 에어컨도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나 자신도 짜증부터 냈을 텐데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다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후에 아파트 주민들 공고나 문제점을

알리는 어플이 생겨서 문자로 상황을 인지하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개선되었다.


그밖에 집에서 단수가 되어서 샤워를 못하는 황당한

상황도 있었다. 콘도 관리 사무실에 알려서

다시 물이 나오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수도세를 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아파트 기술자가 다른 곳 공사를

하느라고 잠시 같은 층 수도를 잠가놓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미안하다는 말조차 없었다.

일단 물이 나오면 해결이 되는 것이고.

인터넷도 심심찮게 끊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무리 좋은 패키지로 빠른 속도의 인터넷을 신청해도 그냥 연결이 안 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신고를 하는 것도 연결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 생활이 일상 아닌 일상이 되다 보니 이제는 별일 아니다는 생각이 들고 웬만해서는 화도 잘 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만 빨리빨리 독촉한다고 바뀌는 것 하나 없다는 걸 진작에 깨달았다.

전기, 물, 인터넷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일상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그 자체가 고맙게 느껴졌다.


한국에 살고 있는 친구들 중에서 남편이 퇴직한 친구들도 있고 아직도 일하는 친구들도 있다.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예전 같으면 누가 잘 나가거나 어디 해외라도 자주 다녀오면 약간의 질투나 부러움이 대화에 묻어 나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50대 중반에 이르니 그런 시기심이나

질투심은 온 데 간데없고 모두 건강 얘기뿐이다.

무얼 먹으면 좋고 혈당이 어떻고 혈압이 어떻고

다들 그런 얘기뿐이다. 누구 하나 다치질 않고 아프지 않으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무탈하고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건강한 삶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게 된다.





친구들도 한때 좋은 대학도 나오고 좋은 직장도 다니고 자식들도 좋은 대학도 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그걸 자랑삼아 얘기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인생 50살 넘으니 잘나고 못나고 크게 다르지 않더라.

건강하고 별 탈 없고 별일 없고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 그게 행복이더라.

예전엔 열심히 살고 어찌 보면 아등바등 살았었다.

열심히 살았으니 지금 같은 날도 왔겠지만

너무 큰 거 바라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면 되는 것 같다.

그 아주 보통의 하루인 아. 보. 하. 가 정말 고맙고

소중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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