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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이 Aug 26. 2024

후퇴도 예술이다

'독일 육군 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반기.

  여러분이 재직 중인 회사에서는 후퇴를 용납하는가?

  다시말해, 실패나 포기도 용인해주는 조직 문화를 갖고 있는가?


  SK 하이닉스에서 한 때 '실패사례 경진대회'를 열어 유연한 조직 문화을 보여준 바 있지만, 대부분의 우리나라 기업과 조직들에게는 상당히 요원한 일인 듯 하다.



  신라 화랑도의 '임전무퇴'의 정신을 배우고,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읽으며 자란 우리(같은 80년대 생 이상)에게 실패와 포기라니. 그 단어를 입에 올리기조차 부담스럽다.

  게다가 그런 정신 덕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을 불사하고 외적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새벽잠을 줄여가며 근면히 일하지 않았다면 진작 망해도 몇 번 망했을 나라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극한의 몰아부치기는, 죽음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 하는 것(아니 해야하는 것)이다.

  모든 사안에 무조건적인 '돌격 앞으로'를 위와 같은 숭고한 정신과 동일시 해서는 안 된다.

  무모한 도전, 성과보다 지출이 더 큰 도전 앞에서는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리더가 먼저 포기를 언급해주는 편이 좋지만, 대개는 실무자들이 먼저 불가능한 상황을 인지하고 보고를 올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데이터가 받쳐준다 해도 아랫 사람 입장에서 '이거 쉽지 않다', '포기하자', '사업을 접어야 된다' 등을 말하긴 참 어렵다. 자칫 의지가 없어 보이거나, 무능한 사람으로 비춰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걸 해결하는 게 당신의 일이야'

  '그거 성공 못 시키면 그 자리에 왜 있어?'

  '다른 사람은 된다는데 당신은 왜 못한다는 거야?'

  리더로부터 한 번쯤 들어봄직한 반응 아닌가.

AI는 외모지상주의자 같다



  물론 때로는, 아랫사람이 게으르고 무능해서 쉽게 포기한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부끄럽지만 내가 막 사원 2년차가 됐던 시절 그런 일이 있었다.


  사원 때 영업부서에서 일했었는데, 담당하던 수 십개 매장들 중 유독 한 곳의 매출이 시원찮았다.

  선배들에게 배운대로 매장에 고객 대상 판촉 행사도 지원해보고, 매니저와 문제점에 대해 논의도 해보고, 특별히 그 매장을 위한 사은품을 제공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매출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곤 실적 회의 때 매출 개선에 대해 부서장이 지적하자, 나도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판촉 행사도 열어주고, 매니저와 상담도 해보고, 제 딴에는 정말 해볼 만한 건 다 해봤습니다. 백화점 자체가 신규 점포여서 고객이 부족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서장은 내 말에 더욱 노발대발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서장의 분노가 당연히 이해 가는데, 그 때에는 '왜 나만 갖고 그래'하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시무룩해있자 선배가 데리고 나가 포인트를 짚어줬다.

  "정말 해볼 만한 걸 다한 게 맞아? 너가 정말 최선을 다한 게 맞는지 잘 와닿지 않아. 다른 매장에서도 똑같이 했던 것들을 해놓고 '다 해봤다'고 말하는 게 화가 나신거지."

  선배의 말을 듣자 비로소, '내가 정말 모든 걸 다 해본 게 맞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도 그 이후로 뚜렷하게 매출 개선은 못했다는 게 함정)


  이렇듯, 때로는 아랫사람이 게으르거나 미숙하여 포기하려는 것을 바로잡아 줘야 할 때도 있다.



  시장과 고객을 두고 총없는 전쟁을 벌이는 기업들 간의 경쟁 속에서도 돌격이냐 후퇴냐 하는 상황이 매 순간 벌어지지만, 아무래도 진짜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쟁터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불굴의 정신을 억지로 덮어씌워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다가 군대와 나라를 말아먹은 사례는 역사 속에도 무수히 많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기관총은, 가히 전쟁의 룰을 바꿀만큼 충격적으로 등장했으나 그 당시 참전국의 군사령관들은 그만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특히나 나폴레옹 시절부터 유럽의 최강 육군국으로 군림했던 프랑스의 경우, '엘랑 비탈(élan vital, 극한까지 몰아 부치는 공격 정신)이라는 과거의 군사 교리에 사로잡혀 소중한 젊은 이들의 목숨을 말 그대로 '갈아 넣어' 버렸다.

  1분에 수 백발씩 총알을 쏟아내는 기관총 앞에 최초 병력이 쓰러지면, 기계적으로 다음-다음 이어 축차 투입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로인해, 1차 대전 기간동안 프랑스군의 전사자 140만 명 중 60만 명이 전쟁 초기 5개월 간 사망했다. 60만 명이나 갈아 넣고서야 '이게 아닌가봐' 포기하고 만 것이다.

(기관총으로 전선이 고착화되고 의미없는 희생이 반복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등장한 병기가 바로 탱크다)


  이미 최선전의 말단 병사는 물론이고 소대장이나 중대장 같은 초급 장교들은 이런 교리가 무모함을 인지했을 것이다. 근본적인 전술의 변화, 혹은 상대의 무기를 파훼할 대책을 요구했으나 나폴레옹 시절의 무용담에 길들여진 장성들이 수용했을 리 없다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우직함의 대가가 수 십, 수 백만 명의 인명이었다.



  반면 그로부터 수 십년 뒤, 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군에서 비슷한 비극이 벌어졌다.


  2차 대전의 독소 전쟁(2차 세계대전이라는 지구 단위의 거대한 전쟁 속에, 독일-소련 간의 전쟁을 일컬음) 중, 가장 치열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이야기다.


  스탈린그라드는 이름에서부터 눈치챌 수 있겠지만, 당시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였다. 그런 도시가 독일군의 최정예 6군에 의해 점령 당했으니, 우선 스탈린 본인이 격노했다. 열악했던 소련군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탈환해 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관한 내용들이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 잘 표현된다.


  아무튼 소련군이 90만 명이라는 막대한 물량으로 몰아 부쳐, 오히려 도시를 점령했던 독일 6군 약 30만 명이 완전히 원형으로 포위되어 버린다.

  원형으로 포위됐다는 것은, 곧 보급이 끊긴다는 뜻이다.

  먹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군인은 없다. 더군다나 군인은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쓰러질 때까지 신체활동을 하기 때문에 일반인의 몇 배의 칼로리를 소모한다. 심지어 그 동토의 땅에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포위된 독일 6군에게 최소한으로 필요한 보급량이 하루 기준 300톤이었다고 한다. 당장이라도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모두가 굶어죽기 십상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모든 병력을 한 점에 집중해 포위망을 뚫어 내어 탈출하거나, 항복하는 길 밖엔 없었다.

  

  그러나 6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파울루스 대장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총통인 히틀러에게 '어찌 할까요?'라고 물어볼 뿐이었다.

  수 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다 여지껏 패배를 몰랐던 독일군의 우월성에 판단력이 흐려진 히틀러는 전장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말도 안되는 항공 보급을 약속하면서 6군이 반격하여 다시 스탈린그라드를 탈환하라 명했다.


  일단 항공 보급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매일 300톤의 물자를 보급해야 하는데, 소련군의 대공망을 '매일' 뚫어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했고, 애초 그만한 물량을 실어나를 수송기도 부족했다.


  병사들의 마음가짐도 정상이 아니었다.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지켜낼 때에는 배후에 나의 집, 나의 가족, 나의 삶의 터전이 있었기에 죽음을 각오할 정신이 생겨났던 것이다. 반면 당시 독일군은 명백히 침략군이었고, 그들이 지켜내거나 탈환해야될 곳은 그들에게도 낯선 겨울 지옥일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 식량이 바닥나고 수은주가 영하를 가르키자 사망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군 내부 라디오 방송에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매 8초마다 독일군이 1명씩 굶거나 얼어 죽는다'는 조롱까지 흘러 나왔다. 제대로 된 전투도 치르지 않았는데, 30만을 헤아리던 병력이 9만 명으로 뚝 떨어졌다. 그나마도 대부분 피골이 상접해 총조차 들 수 없는 상태였다.

  파울루스의 참모들이 진작부터 항복해야 한다고 권했으나, 파울루스는 '총통이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총통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만 되뇌였다. 천하에 못난 리더였다.


  히틀러도 못 나기는 만만치 않았다.

  본토의 독일군 수뇌부에서도 6군의 항복을 허락해야 그나마 소중한 9만 장병의 목숨을 구한다고 히틀러에게 간언했지만 내내 듣지 않다가 마지못해 이상한 명령을 내린다.


  '6군 사령관 파울루스 대장을 원수로 진급시킨다'

   (군계급상 대장은 소위 별 넷 4성 장군이며, 원수는 별 다섯 5성 장군이다. 장성으로서 최고위 계급이다)


  파울루스가 무슨 공을 세웠다고? 모두가 일순 아연실색했지만, 이내 히틀러의 저의를 알아챘다.

  독일군 역사상, 항복한 육군 원수는 없었다. 이겼거나 죽은(전사든 자결이든) 원수만 있었을 뿐이다.

  한 마디로 파울루스에게 자결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파울루스도 그제야 히틀러를 배신하기로 마음 먹는다.

  원수 진급 메세지를 접하고 곧 소련군에 항복한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그의 우유부단함이 불러온 대가가 너무 가혹했다.

  파울루스는 전후 재판에서 항복을 허락하지 않은 히틀러를 비난하며 본인은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그가 올바른 리더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을까?


  앞서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군명유소불수(장수가 전쟁터에 나오면 임금의 명령도 듣지 않는다)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리고 충분히 히틀러의 허락없이도 항복을 선택할 수 있었던 군사령관으로서의 무책임함과 우유부단함에 헛 웃음이 나온다.



  솔직히 직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많지 않은가?


  기관총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과거의 성공 경험에 심취해 변화 대응을 게을리 했던 프랑스군의 장성들이나, 반드시 포기(항복)를 했어야 했음에도 그것을 입에 담지 못하게 하던 히틀러와 그런 무모한 리더만 바라보고 있던 우유부단한 파울루스들은 얼마든지 있다.


진짜 롬멜의 방풍안경은 알이 훨씬 크고 투명한데



  반면 같은 2차 대전 시기 독일군에서, 파울루스와 달리 과감한 후퇴를 한 장성도 있다.

  바로 '사막의 여우'라 불렸던 에르빈 롬멜이다.


  롬멜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연합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중과부적으로 연합국의 물량공세에 점차 수세에 몰렸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6군과 비슷하게 연합군에 의해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냉정하게 전황을 살피던 그는(전선의 최고 사령관이 직접 정찰기를 타고 위험천만한 적정을 살폈다고 한다), 히틀러의 사수 명령도 무시하고 병력을 철수시킨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던 내내, 적보다 열세한 병력으로 과감하게 공격을 밀어 부쳤던 롬멜이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하자 미련없이 퇴각한 것이다.

  그로인해 히틀러 눈 밖에 나 좌천되고, 훗날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히틀러로서는 롬멜이 미웠는지 모르겠지만, 워낙 국가적인 위상을 가졌던 영웅이어서 직접 국장으로 예우해준다.


  아무튼 비겁했던 파울루스는 전쟁이 끝나고도 비굴한 삶이나마 천수를 누렸고,

  소신있던 롬멜은 자결에 이르렀다.


  그 때나 오늘날이나 흔히 롬멜은 찬양하고 파울루스에겐 비난을 보내지만,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쉽사리 롬멜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할 만한 사안인지, 혹은 실패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면밀하게 생각하는 것.

  사실에 입각해 소신껏 위에 보고하여 포기를 관철시키거나, 그게 아니라면 본인에게 주어진 권한 하에서 결단을 내리는 것.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후퇴도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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