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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이 Aug 26. 2024

자기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서류에 찍은 도장으로 600만 명을 죽인 이야기.

  비가 오는 날 퀵 서비스를 이용할 일이 생겼다.

  정확히 얘기하면, 비와 무관하게 퀵 서비스를 불렀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사실 내가 업무상 퀵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과 비가 내리는 것은 아무 연관성이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퀵 기사님이 흠뻑 젖은 채 오셨기에 당연히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부터 일었다.

  "어휴, 비 오는데 고생 많으시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진심으로 서비스 직에 계신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 편이다. 짧지만 그 말도 진심이었다.


  그러나 기사님이 돌아서는 내 뒤에 대고 하신 말씀이 퍽 실망스러웠다.


  "이거 내용물이 뭐예요? 가다가 많이 젖을 겁니다?"


  물음표를 적긴 했지만, 실제 기사님 말맺음이 통보에 가깝다고 느꼈다.


  "오토바이에 수납 박스나 커버되는 게 있는거 아니에요? 내용물이 서류인데 젖는다고 하시면.."

  "박스있죠, 근데 지금 비 오는거 보이시잖아요. 가다가 젖습니다."

  비가 오니 미리 보강을 하라 안내해줬다면 몰라도,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직전 통보하듯 얘기하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나도 좀 얹짢게 말했다.


  "기사님 그냥 그렇게 젖는다고 말씀하시면 제가 어쩝니까. 박스가 있는데 왜 젖는지도 이해가 좀 가지 않는데... 잠시 기다려주세요, 비닐을 좀 갖고 올게요."


  서류를 비닐로 둘둘 감은 뒤에야 기사님을 보냈다.

  기사님 입장에서는 비가 오면 보낼 사람이 알아서 보강하길 바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은 본질적으로 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


  이 기사님 스스로 생각한 본인의 역할은 아마도 '나는 고객의 물건을 받아 배달해주는 사람이다'일 것이다.

  정말 그게 맞나?

여기 안 시키신 수분도 추가한 촉촉한 서류요!



  여기에는, '나는 고객의 물건을 받아 (온전하게) 배달해주는 사람이다'가 빠져있다.


  보통 퀵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들의 니즈는 무엇인가?

  '내가 물건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정확히, 빠르고 온전하게 보내고 싶을 때' 아닌가?


  안타깝게도 저 분은 '배달한다'는 본인의 과업과, '온전하게 전달한다'는 역할(직무) 구분하지 못한 것 같다. 배달은 퀵 서비스 기사님의 주요한 과업 중 하나이지만, 본질적으로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의 하위개념이다.


  저 분이 본인의 역할 인식이 제대로 되었다면, 먼저 내게 보강하도록 안내해줬거나 혹은 본인이 고객의 물건이 젖지 않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노력함에도 고객님의 물건이 다소 젖을 수는 있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을 것이다.

  그것이 고객의 입장에서 물건(서류)가 젖지 않아야 물건으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다. 즉, 눈에 보이는 단순한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가치를 전달한다'는 차원의 개념 이해인 것이다.


  이쯤되면 퀵 기사님께 너무 무리한 기대를 하는 것인가?

  이 밖에도 역할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단순 과업에만 매몰된 사례는 무척 많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례인데, 바로 2차 세계대전 기간의 전범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얘기다.

  이를 소재 삼아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의 제법 유능한 공무원이었다. 행정처리 면에서 유능했다는 의미이다.

  그의 주 업무는 유럽 곳곳에 수용돼 있는 유태인들을 '최종 해결책(절멸계획)'에 따라 가스실로 보내는 것을 승인하는 이었다. 쉽게 말해, 누군가를 죽인다는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600만 명을 죽이는데 행정적으로 관여했다.


  당연히 A급 전범이었으나, 아이히만은 본인의 신분을 일찌감치 변조하여 교묘히 재판을 피해갔다. 그리곤 수용소를 탈출하여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15년 간 다른 사람으로 살아갔다.

  다행스럽게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가 신분을 위조한 아이히만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납치한 뒤 이스라엘 법정에 세웠다. 체포 당시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재판과정에서 아이히만이 뱉은 말이 무척 유명하다.


  "나는 공무원일 뿐이었다."

   (아이히만을 취재한 한나 아렌트가 각색한 표현이라고도 하지만, 어찌됐든 '나는 공무원으로서 상급자가 시키는대로 따랐을 뿐이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은 확실하다)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그가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의 '무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정의했다.

  아이히만은 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인식없이, '나는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고, 이 서류들에 도장을 찍는 일을 할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었을 뿐, 이 학살에 대해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공무원으로서 공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진정한 역할이자 사명이라고 말했던 들,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들이 아버지가 유태인 학살자라고 자기 여친에게 자랑한 통에 들킴.. 그 아비에 그 아들



 회사에 신입사원들이 입사하면 짧게는 1~2주, 길게는 4주 이상 입문교육을 실시한다. 그리고 그 입문교육의 많은 프로그램 중에, 가장 첫 번째 모듈로 진행되는 것이 대개 '역할 인식'이다.

  사실 직장인으로서의 역할 인식은 비단 신입사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저는 신규 입사자에게 컴퓨터 장비를 주는 일을 하는데요. 컴퓨터 가지러 오세요.'

  '저는 안내 데스크를 지키는 사람인데요? 주차 안내까지 할 필요는 없죠?'


  과업 기준으로만 본다면, 위의 상황이 각각 회사 장비를 관리하는 부서와 총무 부서로 구분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올바른 역할 인식을 더한다면 다시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나는 신규 입사자가 원활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입사 전에 컴퓨터를 미리 자리에 세팅해줘야겠다'

  '나는 우리 회사에 방문하는 손님들의 편의를 돕는 사람이다. 필요한 경우 원활히 주차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


  나 역시 매 순간 본질적인 역할에 충실했다고 말할 순 없다. 반성할 거리도 많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여러분은 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역할에 맞게 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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