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은 우리나라에서 제주에만 있는 신비한 숲이다.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제주 사투리 '곶'과 자갈을 의미하는 제주 사투리 '자왈'을 합쳐 만든 단어다.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윗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 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원시림의 숲을 이룬 곳이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가시덤불 때문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곳이었지만 그렇게 버려진 땅이었던 곳을 가꾸어 나무들을 가까이 볼 수 있게 만든 환상의 숲 곶자왈이라는 공원이 있다. 제주의 올레길도, 사려니 숲도 좋지만 이 환상의 숲에서는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식물을 많이 만날 수 있어 더욱 좋다. 바위 사이 조그마한 틈이라도 나무들은 자라나고, 현무암 구멍 속에서도 싹은 돋아났다, 살아남기 위해 어디로든 햇빛을 찾아 몸을 휘고 비틀었다. 정말 죽을힘을 다해 사는 나무들이다.
힘겹게 사는 나무들을 보니 설악산 비선대 가는 길 큰 바위 위에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생각났다. 정성스레 가꾼 분재처럼 낮은 키의 잘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풀 한 포기 없는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다. 흙도 없을 텐데 저 나무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났을까. 그 나무 앞에서 한참 동안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적이 있다. 또 얼마 전에 길을 걷다가 보도블록 틈새에 작은 들국화 하얀 꽃 두 송이가 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작고 여린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에 고개가 숙였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칡과 등나무를 같이 본 것도 이 숲에서 처음이다. 갈등이라는 말의 어원이 칡 갈(葛), 등나무 등(藤)에서 유래되었는데 칡의 줄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 줄기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 서로 뒤엉키면 그 둘을 떼어 풀어놓기가 매우 어려운 데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칡덩굴에 깔린 등나무가 썩어 없어지기도 하고, 1년 2년이 지나면 등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 역전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가 서로 부딪히기에 살아가기도 하고 때론 희생되기도 하는 식물들은 죽어서도 양분이 되어 또 다른 숲의 밑거름이 되어준다고 한다. 식물 간의 갈등이 만든 1~2㎝의 부엽토와 돌과 돌 사이에 생겨난 틈인 숨골에서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돌무더기 땅이 숲을 이룰 수 있었다.
산동 나무는 덩굴식물이 아닌데도 햇빛을 받기 위해 30미터가 넘게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땅속 깊이 흙 속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나무들은 돌 위 땅 밖으로 뿌리를 뻗으면서 얼마나 힘을 주었으면 그렇게 근육질의 뿌리가 되었는지 눈물겹기까지 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 집 마당에 있던 목련이 또 생각났다. 이사 왔을 때 마당에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이사한 다음 해 가을, 우연히 올려다본 나무에서 기괴한 열매가 달린 것을 보고 나는 놀라서 그 나무를 잘라 버렸다. 자세히 보면 자유분방하고 씩씩한 소녀의 이미지인 그 열매가 왜 그렇게 징그럽게 보였는지, 나는 참 이상한 나무라고 생각했다. 자르고 나서야 봄에 그렇게 순결한 천상의 꽃을 피웠던 목련인 것을 알았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서 아주 작은 곁가지가 하나 나오더니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닌가. 지금은 꽤 큰 나무로 자라 꽃이 피며 봄이 온 것을 먼저 알리고, 꽃이 지면서 그렇게 순결한 아름다움으로 감탄을 주었던 꽃잎이 추하게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생로병사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철학을 하게 하는 나무가 되었다. 또 꽃이 질 때 커다란 꽃잎이 땅에 떨어지다가 밑에 있는 가지에 척 걸려있으면 마치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 속 시계처럼 보여 그 누추한 꽃잎이 미학적 즐거움까지 주기도 한다.
생각 없이 함부로 자르고, 말라죽게까지 했던 나무들인데 그들도 살려고 몸부림치며 죽을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것을 곶자왈에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