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80년의 울림》을 읽고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전도서 12장 1절)
이번 이사할 때 책을 많이 정리했다. 버리기도 하고 헌책 가져가는 곳에 보내기도 했다. 문예지 정기구독하는 것이 많고, 문인들이 새로 책을 내면 보내주기도 해서 그동안 쌓인 것이다. 잡지는 쉽게 버릴 수 있지만 필자가 친필로 사인을 해서 보내주는 책은 버리기가 쉽지 않다. 다시 한번 읽고 정리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가까운 문인이나 문학 회원의 책은 가까이 두고 자주 읽는 편이다.
어제도 책 한 권을 받았다. 같은 수필문우회 회원이 쓴 《윤동주, 80년의 울림》이라는 책이다. 그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이며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필이 등재된 실력 있는 수필가이다. 윤동주의 시 <서시>에 꽂혔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구절에 필자는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떠난 한국-중국-일본 기행이다.
이 책을 읽다가 나는 엉뚱하게, 작가의 의도는 아닐 텐데, 윤동주가 참 그리스도인이구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요즘은 그리스도인이 부끄러운 시대인 것 같다. 얼마 전 밝혀진 사실이다. 교회 장로로, 기독교계 지도자로 신앙 간증집까지 낸 사람이 너무나 부끄러운 짓을 했다. 차라리 간증이나 하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존경할 만한 목사님도 어른도 별로 없는 것 같은 세태에서 참 그리스도인과 명목상 그리스도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윤동주는 할아버지가 독실한 장로교회 장로였고 그의 집안 식구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 윤동주의 외가는 그에게 애국심과 순수한 감수성을 키워 주었는데 외삼촌은 특히 독립 정신과 기독교 사상을 그에게 심어 주었다. 그가 그토록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것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자 했던 그의 신앙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예수님을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에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 창조주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간 예수님을 부러워한 것이다. 어쩌면 그도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살다 간 것 같다. 28년을 살았지만 불멸의 시를 남기고 그는 갔다.
십자가(1941. 5.31)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휫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다행히 그의 주위에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한글조차 쓰지 못하게 하던 시대에 일본이 보기에 불온한 시, 그렇게 위험한 시를 일본에 들키지 않고 잘 숨겨 두었다가 그가 죽고 난 후 시집을 내어 준 친구들이다.
존 웨슬리는 거의 그리스도인 (almost Christian)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종교적 행위를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명목상 그리스도인인지에 대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없고 삶의 주인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다. 종교적 행위는 있으나 성령의 열매는 없고 외적 경건은 있으나 내적 거듭남은 없다.
독일이 히틀러 광풍에 빠졌을 때 본 히퍼와 같은 참 그리스도인이 있어 독일은 그나마 체면을 살렸다면 우리는 윤동주 시인과 같은 참 그리스도인이 많았던 민족이다. 자랑스러운 우리 선배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도무지 그렇지가 못하다. 나 자신도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읽으며 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 않나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