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by 권민정


구한말 패망해 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의병이야기를 다룬 TV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재미있게 보던 중 나는 주인공 유진과 신애의 대사가 마음에 와 꽂혔다.


“수나 놓으며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내 기억 속 사대부 여인들은 다들 그리 살던데.”

“나도 그렇소.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우리는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의병이오. 할아버지께는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 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그 장면을 보며 내게도 생각나는 사람이 한 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께 여러 차례 들어왔던 이야기 속 할아버지. 나 역시 ‘왜 그분은 그런 인생을 선택했을까? 그 길이 죽음을 재촉하는 고통의 길임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죽음 앞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마지막 길을 갔을까?’ 하는 의문을 늘 품고 있었다. 인생은 여러 길이 있을 텐데 꼭 그렇게 험한 길이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다른 길이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외종조부 되시는 분이다.


그는 1903년 충청도 시골 한 양반 댁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유년을 보낸 시기는 우리나라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명이 바뀌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침탈하며 그 야욕을 드러내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성 제1 고보에 진학하여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된다. 고보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혼하여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터졌다. 다음 해 그는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대에 힘을 쏟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하기까지.


광주학생 운동 때 왜 그는 학생도 아니었는데 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까지 했을까? 한 여인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그는 가족을 위한 의무보다 일본에 저항하며 활동하는 것이 더 중요했을까? 그의 선택은 그의 가족에게는 너무 잔인한 일이거나 무책임한 것은 아닐까? 일제의 식민지가 된 지도 20년이 넘어 많은 사람들이 순응하며 살던 때였을 텐데.


그 부인은 남편이 옥사한 후 마음의 병을 얻어 다음 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뿐인 아들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아들은 부모를 그렇게 잃고 마음을 잡지 못해 무척 방황하며 공부에도 뜻을 잃었고 보통학교만 졸업한 후 평생 어렵게 살았다.


나는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분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분을 아는 이는 이미 다 돌아가셔서 1930년 대 신문들과 독립운동사 사료집을 찾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기사와 기록들이 있었다. 특히 1932년 동아일보 기사는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지 짐작되어 당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 순사와 형사들이 수십대로 나누어 시내를 엄중 경계하는 동시에 가택을 수색하고 가가촌촌을 이 잡듯 뒤지어 십여 명을 검거 ….’ 또 어느 날의 ‘…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바 그 내용은 비밀에 부침으로 아직 알지 못한다.’는 기사에서는 일제의 악명 높은 고문이 떠올랐다.


외종조부의 재판 기록을 보니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고 2년 6개월의 선고를 받았다. 사법경찰관 심문 조서를 읽으며 얼마나 많은 고문으로 인한 큰 고통이 있었을지 짐작되었다. 그는 일제 식민지 통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가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게 된 것의 시작점이다. 그는 고향에 내려가 청년을 지도하고 농민조합운동을 하였다. 농민이 전체 인구의 8할을 점하고 있어 농민운동이 항일운동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므로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운동에 전력하였다. 일제의 수탈이 극심할 때였다.


한국의 유림들은 애국자였다. 제대로 된 선비라면 일제에 순응하기보다는 저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비의 고장 안동에서 수백 명의 독립투사가 나왔듯이 대대로 유학자 집안 후손인 그는 결코 일본의 침략을 용인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고보를 다니며 자기 성찰의 깨달음이 더 깊어져 일제에 저항하는 길을 가게 되었을 것이다. 신서적을 읽고 혁신적인 사고를 길렀다.


이번 기회에 구한말부터 해방되기까지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며, 또 그분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서 그 글들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나는 그분에 대한 나의 질문에 답을 찾은 것 같다.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따르면 우리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긴 망국을 한탄하며 목숨을 끊은 전국의 선비는 28명이었다. 또 ‘옛사람이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오로지 남아있을 수 없는 것인가’라고 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불꽃처럼 목숨을 바친 의병이나 독립투쟁을 한 분들이 있어 정신이 이어졌고 역사는 살아남은 것이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의병을 선택했던 아기씨가 말했듯이 그분도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내 아내, 아들에게는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 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그분은 돌아가신 후 60여 년 지나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이 추서 되어 나라에서 후손을 찾아서 전했다.


1900년 초 우리나라에 와 있던 서양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이 수수께끼 같다고 했다. 우리 민족은 탄압받고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결코 복종하지 않는, 동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민족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귀하고 가족은 소중한 것이지만 불꽃처럼 사신 분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있는 것 같아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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