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이다. 어젯밤 송년 파티를 하느라 늦게 잠들었는데 잠이 깨어 보니 새벽 4시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인지 벌써 며칠째 이 시각이면 눈이 저절로 떠진다. 한국에서는 저녁 식사 준비에 바쁠 시간이다. 나는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미국에 있는 딸네 집에 왔다. 이곳은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샴페인이라는 작은 도시다.
오대호(五大湖)가 멀지 않은 곳, 조그마한 호숫가의 이층 집은 추운 날씨에 난방기 모터소리가 요란하다. 2층 침실 바로 옆에서 기계가 돌아가는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안개 낀 만(misty cove)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이 아파트 단지는 호수를 끼고 서른 채 남짓 이층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다라고는 없는 대평원지역에서 만(灣)이라는 이름이 처음에는 좀 특이하게 느껴졌다. 호수가 있어 물안개 자욱하다는 뜻인지, 아니 바다를 그리워하며 지은 이름인지도 모른다.
1층으로 내려온다. 집 바로 앞에 있는 호수가 깜깜하다. 호수 저 건너편 집의 전등이 호수 수면에 반사되어 비치는 곳을 빼고는 온 세상이 불빛 하나 없이 어둡다. 창 가까이 얼굴을 대고 불빛 비치는 곳을 보니 무엇인지 물체가 있다. 좀 더 자세히 본다. 캐나다 거위(Canada Goose)다. 호수는 이미 반 넘게 얼어있는데 얼지 않은 물가에 거위들이 웅크리고 있다.
몸을 보호하는 깃털이 있으니 춥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가운 얼음 위에서 머리를 깃털 속에 처박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보인다. 어제 낮, 남향인 집 앞 잔디 위로 햇빛이 쨍쨍 비춰 따뜻할 때 거위와 청둥오리 수십 마리가 햇볕을 즐기는 걸 보았다. 거위와 오리도 햇볕 쬐기를 좋아하나 보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책을 읽는다. 아직 아기가 태어나지 않아 시간 여유가 있다. 시베리아 숲 호숫가 오두막에서 6개월 동안의 은둔생활을 하고 그 생활을 기록하여 소로우의 <월든> 같은 아름다운 글을 남긴 프랑스 작가 실뱅 테송은 67권의 책을 가지고 숲으로 들어갔다. 왜 그곳에 파묻힐 생각을 했느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읽어야 할 책들이 밀려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리라 했다. 나는 책 4권을 가지고 왔다. 실뱅 테송의 <희망의 발견: 시베리아의 숲에서>는 독서의 즐거움을 위해, 단테의 <신곡 지옥편>, <신곡 천국편>,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은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다시 읽기 위해서다. 이런 조용한 시간이면 한국에서 잘 읽히지 않던 책을 꼼꼼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호수를 향해서 열린 창문 하나로 나의 삶은 충분하다고 실뱅 테송은 말했다. 번잡한 일상사에서 벗어나, 해야 할 가짓수가 축소된 생활에서 호수를 향한 창을 통해 나도 뭔가를 발견하고 갈 수 있을까?
아침 7시, 바깥이 훤해진다. 동쪽이 벌겋다. 이 집의 좋은 점은 해 뜨는 동쪽부터 해 지는 서쪽까지 다 보이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