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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없는 상승

by 공책

내가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한국에 있던 친구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을 통해 ‘승진’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게 됐다. 승진… 그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그냥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하는, 그런 일인 걸까?


이후 나도 미국에서 취업을 하고, 승진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미국에서도 승진에는 나름의 경쟁이 있고, 승진을 하면 연봉이 크게 오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직급이 바뀌니,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할 때 마음속에 걸림돌 하나가 사라진 느낌도 들었다.


미국에서도 승진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연봉이 오르고, 맡을 수 있는 일의 범위도 넓어진다. 조직 내에서 내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때로는 기술적으로 더 중요하거나 도전적인 일을 맡을 수 있는 기회로 연결되기도 한다. 커리어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분명히 긍정적인 변화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곳에서는 승진을 제안받고도 거절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승진 이후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중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커리어 방향과 맞지 않을 경우 승진을 고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승진은 커리어를 위해 열심히 추구해야 할 ‘목표’ 일 수도 있지만, 더 강력하게는 ‘수단’이다. 더 높은 연봉을 위한 수단, 더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 위한 수단, 더 넓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 그러나 만약 이 수단이 자신의 진짜 목표와 어긋난다면, 이들은 과감하게 그 수단을 포기한다.


한국에서도 승진은 경쟁을 동반한다. 경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있다.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는지를 민감하게 신경 쓴다는 점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승진 문화에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수단이어야 할 승진이 ‘목표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는 뒤로 밀리고, 어떤 직장에 들어가서 어느 직급까지 오르는지가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다. 본래 수단이었어야 할 승진이, 어느새 목표의 자리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한국에서 수단이 목표를 압도하는 건 익숙한 일이다. 입시 경쟁이 바로 그 예다. 공부가 본래의 목적을 잃고, 점수만을 추구하는 기계적 과정으로 변질된다. 개인의 탓이 아니다. 이 구조 자체가 문제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수단의 목표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평생을 그 논리에 따라 살아간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어떤 커리어를 만들고 싶은지는 희미해지고, 단지 ‘어떤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선명해진다. 행복한 삶이라는 목표도, 어느 동네, 어떤 아파트라는 수단 속에 희미하게 파묻혀버린다.


그렇다. 한국 사회는 수단이 목표보다 커지다 못해 그 자리를 꿰차버린 사회다.


수단이 목표를 대신하게 되면, 인간의 한계는 금방 드러난다. '어느 회사에서 어느 자리에 가겠다'는 목표를 이루고 나면, 정작 그 자리에 올라선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게 된다.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것이 진짜 자신의 목표가 아니었음을 깨닫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사회 전체도 예외는 아니다. 수단이 제자리를 잃고 목표를 대신하게 되면, 정작 그 수단을 통해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들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난다. 수단을 획득하는 데만 몰두한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도, 그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목적 없는 수단의 독점은 결국 공동체 전체를 정체시키고,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수단이 목적을 대신하는 순간, 사회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조차 잊는다. 그 끝이 어디일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그 '진짜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진지한 성찰이다. 목표로 하는 자리에, 자격에, 지위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진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아니면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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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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