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전자 엔지니어로서 내가 크게 부족한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실험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이론을 공부하거나 개발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직접 손을 하는 실험을 잘하지 못했다.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것에 대한 별다른 흥미도 없었다. 나는 직접 해보고 관찰하기보다는 생각하 사고하기를 훨씬 더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하지만 전력전자라는 분야는 다른 어떤 분야 보다도 직접 손으로 하는 실험이 중요한 과목이었다. 나는 박사 학위를 하는 동안 주로 전력전자의 제어 이론에 관한 이론을 공부했고 박사 학위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서 학위를 받을 수 받을 수 있었다. 그러 내가 이 분야에 엔지니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험에서 경험을 쌓아야 했다. 문제는 그런 기회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첫 번째 취업을 했을 때도 그리고 두 번째 취업을 할 때에도 이점을 항상 고민했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아예 실험을 전혀 하지 않는 엔지니어로 아예 길을 잡아버리는 것이었다. 시뮬레이션이나 이론 등을 주로 하는 자리를 찾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길은 실험을 잘 배울 수 있는 곳에 가서 나의 단점을 매워 더 나은 전력전자 엔지니어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회사를 택할 때도 그리고 두 번째 회사를 택할 때도 나는 후자를 택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실험실에서 직접 회로 보드를 가지고 실험을 해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운이 좋게도 두 번째 회사에서는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안내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도 조금씩 실험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을 하다가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당황해서 머리가 하얗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큰 도움을 준 건 경력이 많은 테크니션 들이었다. 한국에서는 모두 기술자로 통칭되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은 비교적 테크니션과 엔지니어의 구분이 명확한 편이다. 테크니션은 주로 납땜과 같이 보다 단순한 업무를 하면서 엔지니어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테크니션들은 보통 대졸자가 아닌 전문대나 고졸의 학력이 많지만 오래 함께 엔지니어와 일했기 때문에 이론은 잘 모르더라도 경험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게도 정말 경력이 많은 좋은 테크니션과 일할 수 있었다.
테크니션들은 이제 학교를 막 마치고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회사에 와서 고군분투하는 나를 마치 자식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하나하나 다 알려주고 싶어 했고 내가 실험을 하다가 당황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오랜 경력으로 나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공부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나에게 비록 학교에서 전문 지식은 쌓지 않았더라도 수십 년의 경력을 통해 많은 지식을 쌓은 테크니션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파트너였다. 내가 목말랐던 것은 실제 현업에서의 경험이었다. 마치 마른 수건이 물을 빨아들이듯 목이 마른 나는 그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을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가령 회로 보드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잘 되지 않으면 나는 모든 것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반면에 테크니션들은 보통 이런 일이 있으면 이게 문제인 경우가 많아라는 식으로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을 해줬고 실제로 그들이 하는 말이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테크니션을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의 경험에서 축적된 지식들, 실험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접근하는 태도, 실험을 세팅하는 방법들까지. 많은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과 무척 친해졌다. 비록 언어가 다르고 나이가 다르더라도 생각은 늘 통했다. 나에게 자기 자식 자랑을 할 때도 많았는데 듣다 보면 역시 전 세계 어딜 가나 부모가 가장 하고 싶은 건 자식자랑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그렇게 테크니션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실험을 하는 나의 능력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오히려 이제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보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는 게 더 재미있기까지 했다. 취업을 한 지 2년가량이 흘렀을 때 잘 되지 않는 실험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혼자 고민해 보기를 포기하고 그냥 다른 팀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팀 사람들이 해결해 줄까?라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왠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붙잡고 고민해 보고 이런저런 시도들을 해보면서 나는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뛸 듯이 기뻤다.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보다는 실험실에서 뭐가 잘 되지 않으면 당황에서 쩔쩔매던 내가 2년 만에 다른 엔지니어도 포기한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하나하나 고민하고 생각하며 문제를 풀어내었다는 것에 대해 나 스스로에게 무한한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새로운 회사에서의 하루하루는 좋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며 하루하루 보람되게 채워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