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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인 Oct 12. 2024

9. 한 번 지나간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은 법이야

3분 뒤 도착 예정이라는데요?

 #이수광 - 걷는 중

 “저기, 처자. 길 좀 물읍시다.”


 탈옥수 이수광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행인에게 말을 건다.


 “네? 아, 네.”


 인근 대학교에 재학 중인 이진아 양은 흔쾌히 답했다가 범상치 않은 인상을 풍기는 것으로 모자라 죄수복 차림으로 구부정하게 서있는 탈옥수를 조심스레 쳐다본다.


 아차, 싶다.


 눈앞의 노인이 온몸으로 뿜어대는 기운을 그녀가 모를 리 없다.


 노인의 다음 대사가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 알고도 남는다.


 그래서 그녀는 노인의 목청을 보호하고 시간도 절약하는 차원에서 다음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냉큼 대답한다.


 “저 천주교에요.”


 “……그려? 나는 무교.”     





 #강신영

 강신영이 출근길에 사 온 테이크아웃 커피 뚜껑을 연다.


 왕년에 입술조차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웠던 커피는 어느새 한 입에 해치울 수 있을 정도로 식어버렸다.


 뚜껑 안쪽에 맺힌 물방울이 사무실 책상 위로 뚝뚝뚝 떨어져 개미 전용 수영장이 되어버린다.


 아직 휴지 사용법을 터득하지 못한 강신영은 손바닥으로 물기를 훔쳐내고 근무복 바지에 대충 닦아낸다.


 젖어도 티가 안 나는 짙은 남색 바지라 다행이다.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다.


 카페인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각성효과를 발휘하길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


 더, 더, 그의 식도와 위는 습자지마냥 커피를 받아낸다. 온몸이 카페인을 원한다.


 구입한 지 네 시간이 넘도록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는 게 조금은 미안해진다.      





 #진강석

 오선아 박사와의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강석은 돌연 자동차를 길가에 세운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자기혐오에 그는 그대로 차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눈을 질끈 감는다.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평생을 해왔던 호흡을 잘할 자신이 없어지고 숨을 들이쉬고 내쉴 자격이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든다. 


 시트를 뒤로 젖혀 선잠을 청한다.


 그날 이후 맘 편히 잠든 적이 없다.


 온몸을 편안히 이완시켜 누워있지만, 머릿속은 무언가로부터 부리나케 도망치는 것처럼 울렁대고 동시에 무언가를 쫓는 것처럼 헐떡댄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양태호 - 접객 중

 결혼을 반년 앞둔 서준모 씨는 예비신부와 함께 금은방에 방문한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신 서준모 씨?”


 커플이 가게에 들어서자 말끔한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초로의 사장이 반갑게 웃으며 맞이한다.


 “네,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미리 준비해뒀습니다.”


 VIP실로 안내받은 커플은 사장이 건네는 고급 크리스털 잔을 받는다.

 시원한 녹차가 담겨있다.


 잔을 만지작거리던 예비신부가 감탄한다.


 “잔이 되게 예쁘네요. 받침도 그렇고.”


 “그러세요? 그럼 어떻게, 예물은 크리스털 잔 세트로?”


 사장이 방긋 웃으며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간이 진열장을 가리킨다.


 진열장에는 반지부터 목걸이, 순금으로 만든 여러 동물 모형까지 다양한 제품이 줄지어있다.


 “그래도 이 늙은이 성의가 있는데, 제가 준비한 것들도 구경해주세요. 후회는 안 하실 거예요. 오늘 할 후회는 아껴뒀다가 나중에 결혼 다 하시고 서로 지겨워졌을 때 하세요.”


 유쾌한 입담에 커플은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로 예물을 살핀다.

 크리스털 잔은 어느새 텅 비어있다.     





 #황중근 - 퇴근 중

 드디어 퇴근한 황중근 이사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한다.


 어차피 늦은 오후에 다시 출근을 해야 하지만, 잠깐 눈을 붙이고 허기진 배를 달랠 수는 있을 것이다.


 “직장을 옮기던가 해야지 원.”


 피곤에 찌든 몸을 등받이에 기대며 황중근이 중얼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업을 잘못 선택한 듯하다.


 “저 손님, 혹시 운동하십니까?”


 택시기사가 오늘의 첫 손님과 대화를 시도한다.


 “제가 운동선수처럼 보이나요? 어떤 운동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중근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묻는다.


 “씨름이요.”


 “아…….”


 사람들 눈은 다 똑같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황중근 이사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낀다.


 그는 우울한 목소리로 소곤댄다.


 “그냥 조그맣게 사업하고 있습니다.”


 “그러시구나. 저는 워낙에 풍채가 좋으셔서 운동선수 아니면 저기 무슨 ‘생활’하시는 분인 줄 알았어요.”


 “생활하는 것도 맞아요. 몸 좀 쓰는 동생들 여럿 데리고 있습니다.”


 “아…….”


 택시기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간다.


 “기사님, 이따 집에 도착하면 깨워주시겠어요?”


 “아, 네네! 피곤하신데 제가 괜히 말을 걸었네요. 쉬세요.”


 택시기사의 저자세에 황중근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는다.


 요상한 상사를 만나 고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만 한 일이 없는 건 사실이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택시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낀 채로 황중근은 깊은 상념에 빠진다.


 눈만 감으면 당장이고 잠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벌써 5년이네.’


 그는 자연스레 이 업종에 처음 들어왔던 시절을 떠올린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황중근은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었고, 신문에 있는 공고를 보고 연락을 취했다.


 공고를 보고 연락드렸다고 전화를 거니, 곧바로 얼굴 마주 보고 얘기하자는 대답이 나왔다.


 황중근은 곧장 사장을 만나러갔다.


 양태호 사장의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실, 좋은 편이었다.


 멀쑥하다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초로의 신사였다.


 결코 환갑으로 보이지 않았다.


 작은 키와 왜소한 체격 때문인지 다소 연약한 인상은 풍겼지만, 힘 있는 목소리와 화려한 입담 덕분에 단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나간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은 법이야.”


 사장이 지원자에게 던진 첫 문장이었다.  


 “예? 버스……. 아, 예에……, 그렇죠.”


 지나간 버스는 종점 찍고 다시 돌아오는 법인데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일까 생각하면서도 지원자는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 버스라는 것도 타고 싶다고 항상 탈 수 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버스는 결코 쉽게 오는 게 아니거든.”


 “예에…….”


 집 앞 정류장에서 타는 51번 버스는 거의 3분에 하나씩 오는데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지원자는 생각했다.


 “지금 서른 살이라고?”


 면접관의 질문다운 질문에 황중근이 냉큼 대답했다.


 “예.”


 “키도 크고 체격도 좀 있네. 운동 같은 거 했나?”


 “고등학생 때까지 유도를 좀 했습니다.”


 “실력은? 잘했나?”


 “잘했으면 선수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역린이나 다름없는 유도 얘기에 저도 모르게 발끈한 황중근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저랑은 잘 안 맞더라고요. 몸 쓰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엘리트 체육은 영 다른 영역인지라…….”


 “그런 깊은 이야기까지 듣고 싶지는 않고.”


 면접관은 지원자의 과거에는 썩 관심이 없어 보였다.


 “평소 무단횡단 같은 건 잘하나?”


 시니컬한 면접관의 태도에 황중근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살면서 신호등 신호를 기다려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요.”


 “영화는? 주로 영화관에서 보나?”


 “영화 티켓 값이 좀 비싸야죠. 요새 불법다운로드 사이트가 잘 돼있어서 그걸로 봐요.”


 “합격.”


 다음 날부터 황중근은 양태호 사장의 밑으로 들어갔다.


 남다른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던 그로서도 다소 버거운 일을 맡게 되었다.


 잦은 무단횡단으로 벌금 20만 원에 시달리곤 했던 사람이 졸지에 마약 밀매로 5천만 원이라는 무시무시한 벌금을 정부에 쾌척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그때 황중근의 머릿속을 지배한 다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기왕 범죄자로 지낼 거 돈 많은 범죄자가 되어보자는 것이었다.   




  

 #양태호 - 영업 중

 고요한 VIP실에는 잔과 받침접시가 서로 맞닿는 소리만이 달각달각 울린다.


 “녹차 좀 더 드릴까요?”


 이어지는 침묵을 깬 사람은 금은방 사장이다.


 지나치게 길어지는 고민에 짜증이 날 법도 하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아뇨, 괜찮습니다.”


 결혼 전에 결정해야 할 사항이 아직 이만 오천 개는 족히 남아있는데 벌써부터 난항이다.


 두 번째 결혼도 피곤한 건 매한가지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장시간의 고민에 지칠 대로 지친 예비신랑 서준모 씨는 사장의 말을 냉큼 받는다.


 “네, 저는 한 잔 더 주세요.”


 “예, 잠시만요.”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한켠에 마련된 미니냉장고에서 미리 만들어둔 녹차를 꺼내 잔에 따른다.


 그리곤 손님에게 내가기전에 비법소스를 다섯 방울 추가한다.


 잔을 받아든 서준모 씨는 망설임 없이 녹차를 마신다.     





 #황중근

 “손님, 도착했습니다.”


 택시비를 치르고 집에 도착한 황중근은 곧장 침대로 빨려 들어간다.


 잠이 줄곧 기다리고 있었는지 순식간에 그의 의식을 채간다.    


 



 #양태호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제가 두 분한테 말씀은 안 드렸지만, 저도 그 반지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정말요?”


 사장의 말에 예비신부는 장고 끝에 적절한 선택을 한 것 같아 더없이 만족한다.


 서둘러 귀가하고 싶은 서준모 씨가 다급히 의견을 덧댄다.


 “맞아. 내 눈에도 그게 제일 예쁘더라고.”


 “미리 결혼 축하드립니다.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사세요.”


 사장은 예비부부를 배웅하며 명함을 건넨다.


 “조심히 가시고, 나중에라도 필요한 거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하다못해 오늘 드셨던 녹차 브랜드도 알려드릴 수 있어요. 하하하.”


 결혼 예물을 마련한 예비부부는 웃음으로 화답하며 명함을 내려다본다.


 예물만큼이나 화려하게 장식된 명함이다.       



 ◆ 태양금은방 ◆     

사장 양태호

TEL. 02-1234-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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