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배추 있어요.”
시장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아직 겨울인 방글라데시에 배추가 시장에 나왔다. 더위에 배추가 있으려니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배추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하긴 배추를 보고 놀란 것보다 “배추 있어요.”하는 한국말에 더 놀란 것이 맞다.
“여기 한국 사람 많이 와요?
“많이요. 이거 한국 사람 사요.”
다카의 재래시장 중 한국인이 많이 사는 시내 중심가의 시장은 한국인들이 찾는 채소를 공급한다고 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배추, 무, 대파, 쪽파, 부추 같은 야채, 콩나물, 두부 같은 한국 식재료를 파는 시장은 굴샨1서클 인근의 시장뿐이다. 수많은 농산물이 인근의 강을 따라 매일 운반되어 온 것이다.
재래시장은 언제나 정이 넘친다. 낯선 방글라데시가 시장에 서면서 ‘이게 사람 사는 거지 뭐’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엔 방글라데시의 전부가 들어있다. 시장 입구는 과일 상이 진을 쳤다. 공기 빠진 낡은 공 같은 검은색 수박, 아기 주먹만 한 앙증맞은 파란 사과와 고운 천으로 싼 것 같은 노랑에 붉은빛을 한 사과, 누런색을 벗어내고 파스텔 톤을 띤 배, 속이 주홍으로 물든 것을 숨긴 거무튀튀하고 길쭉한 파파야, 위로 솟은 잎으로 싱싱함을 자랑하는 파인애플, 올록볼록 진한 녹색 구아버, 모두가 낯선 과일이지만 낯설지 않다. 야채 전에는 고추, 가지, 오이, 배추, 무, 마늘, 양파, 고수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싱싱함을 뽐내는 채소들이 한가득 싸여있다. 이 봄꽃 같은 채소가 가득한 시장은 봄 내음이 가득하다. 매대뿐만 아니라 판매원들 역시 봄의 싱그러움 마냥 싹싹하게 말하면서 손님이 지나가면 자기 물건이 좋다고, 이리로 오라고, 값이 싸다고 한 마디씩 던지는 음성이 통통 울린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됨을 느낀다. 우리가 지나가면 우리를 향해 돌리는 고개의 움직임을 느낀다.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리듯 천천히 돌아가는 그런 것 말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라치면 이 집 저 집 장사꾼들이 몰려와 흥정을 방해하기도 한다. 우리의 흥정을 다 보았으니 그 시장 안에서는 더 이상 흥정을 할 수 없다. 그래도 흥정을 붙이면 낮아지는 게 가격의 묘미인지라 그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포목 전에는 만들어진 옷뿐만 아니라 옷으로 만들어야 하는 일부 제작된 천을 팔고 있었는데 여성용 3 피스 옷감이 3,000따카라고 한다. 결국은 2,000따카에 흥정해서 샀다. 옷을 만드는 건 시장 한쪽에 재봉틀 한 대 놓고 직접 제작하는 재봉사의 몫이다.
볼 빨간 보름달이 내려다보고 있는 저녁에 시장에 갔다. 무슬림 지역에 돼지고기를 파는 곳이 있다고 해서 호기심이 생겨서 나간 참이다. 퇴근 시간인지 수많은 인파가 도로를 메웠다.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빈손으로 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 집에선 맛있는 음식이 필요했으리라. 그 필요에 따라 장은 본 양손에 든 것은 사랑이리라. 그래도 그들의 얼굴엔 고단함이 살짝 묻어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참 어렵다. 인생이 고달프다. 고달프지 않은 삶은 없다. 누구나 그 삶의 고달픔을 스스로 짊어지고 간다. 여기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다. 머리에 인 박스도, 어깨를 늘어지게 만드는 자루도, 근육을 떨게 하는 무거운 짐도 모두 그들이 짊어져야 할 고달픔이다. 강렬한 해가 머리를 뜨겁게 해도, 살랑이는 바람에 단추 하나쯤 풀었던 날도, 보름달 빛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밤에도 짐을 나르고 바퀴를 굴리면서 살았을 삶이다. 그날 벌어 그날 먹어도 그들의 기억엔 꼬박꼬박 저축해 놓은 시간이 있을 것이다.
저녁 시간 시장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물건을 고르는 손길이 분주하다. 그 얼굴엔 늘 웃음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재잘대는 목소리에도 어둠이 숨어있고 웃음이 숨어있을 터였다. 오죽 지 않은 봉지 하나를 든 손에도 가족의 즐거움이 배어있을 터였고 큰 봉지라도 그 안에 즐거움보다 고단함이 있을 것이다. 삶이 고단할수록 부지런한 법이다. 지금 고단하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생각하면 추억이듯 한참 후에 누군가를 웃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 장을 보는 것이리라. 아마 1인분의 고단함이 아니라 하나의 고단함으로 가족에겐 웃음을 주리라.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늘 쉼표가 간절했던 삶이었다. ‘돈을 벌고 가정을 건사하는 것이 나의 삶이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했다. 여기 방글라데시에서 이 질문에 수정이 필요하다.
시장은 늘 새로움을 창조하고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 방글라데시의 시장 역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작은 가게 하나가 큰 유행을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무더위에 무더위를 더하는 뜨거운 날씨에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재래시장은 잠들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그리우면 시장에 가면 된다. 시장은 왁자지껄이라는 한 단어면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왁자지껄이 가지는 감정은 에너지다. 시장은 에너지의 공간이며 에너지의 시간이 지배한다. 이 에너지는 배워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몸이 체득하고 손님들과의 부딪힘 속에서 배인 것이다. 시장을 구경하면서는 거기 사는 사람들처럼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시장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 시장은 만남의 장소이다. 사람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체 에너지를 발산하는 현재만을 가진 시작의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