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초석

우리들의 수상록 |

by MeeyaChoi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agape), 성적인 사랑 에로스(eros), 친구와의 사랑 필리아(Philia)를 정의했던 에리히 프롬이 지금 살아있다면, 넘쳐나는 수많은 사랑 이야기에 엄청 헷갈릴지도 모른다. 나도 어린 딸을 키우면서부터, 정신과 의사 오은영 박사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금쪽같은 내 새끼'를 통해서 수많은 가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지켜봤다. 복잡한 가정사들의 공통된 한 원인으로, 인간이 최초로 맺는 부모와의 관계가 지목되었다. 어린 시절 받은 부모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믿음의 초기값을 형성하며, 평생에 걸쳐 다양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 역시 다른 엄마들처럼 어마무시하게 노력했지만, 작은 위험신호에도 '안돼' 하는 바람에, 딸을 위해 애써 다지던 사랑의 초석이 흔들거렸다.

매우 소소한 예로, 딸이 초등학생 때였다. 딸이 어디서 찾았는지, 동그란 뿔테 안경을 낀 남자애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르는 그림이 그려진 책을 사달라고 했다. 그리고 애가 시도 때도 없이 그 기괴한 책만 붙들고 있어서, 나는 그 책을 6단짜리 책꽂이 꼭대기에 던져놓고 출근했다가 저녁에 내려줬다. 하지만, 책은 1년에 한 권씩 시리즈로 나왔고,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해리포터였다. 나중에 고등학생이 된 딸은 그때 의자 위에 까치발로 서서 짝대기로 끄집어내서, 다 읽었다고 말했다. 키 작은 어린애가 책꽂이에 매달렸을 위태로움에, 뒤늦게 아찔했다.

언젠가 나는 크게 앓느라 모든 집안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고, 남편은 1년 가까이 온갖 밀키트를 동원하여 나를 먹여 살렸다. 멀리 사는 딸이 집에 오자, 밤마다 남편과 딸은 머리를 맞대고 다음 날 뭘 먹을지 의논했고, 아침마다 음식 재료들이 현관 앞으로 수북이 배달되었다. 비좁은 싱크대 앞에서 남편과 딸은 콧노래를 부르며, 레시피 따라 시간을 재고, 찌지고 볶으며, 처음 보는 음식들로 한 상을 차려냈다. 내가 이런저런 요리법을 묻자, 딸은 요리는 과학이라며 온갖 얘기를 쏟아내어, 모두 시끌벅적하니 맛있게 밥을 먹었다. 둘이 설거지까지 해치우는 신비로운 광경을 지켜보면서, 내가 조용히 포장지며 음식찌꺼기를 버리고 어질러진 부엌을 치우자, 딸은 '우리 가족은 아주 협조가 잘 된다'며 환하게 웃었다. 둘이 지칠 무렵, 나는 된장찌개와 멸치볶음과 김치로 뻔한 밥상을 차렸고, 모두 말없이 뚝딱 먹어치웠다.

아무것도 못하게 된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멈췄다. 딸이 신나서 제 일을 하도록, 나는 그냥 믿고, 잔소리 하지말고, 소리 없이 지켜보는 게 나을 뻔했다. 자식은 어린 만큼 단지 경험이 적을 뿐이며, 오히려 선입견 없이 용감하게 부모보다 더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부모가 굳이 자식에게 더 튼튼한 사랑의 초석을 놓아주고 싶다면, 부모 스스로 멋진 인생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식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는 게 낫다. 그래야 혹시 부모가 초기값을 잘못 설정하더라도, 자식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의 초석을 반듯하게 다시 놓으며, 행복한 길을 찾아갈 거다.


부모가 놓아준 가장 큰 사랑의 초석은 자식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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