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보다 느리다 해도
패기 넘치던 햇병아리 러너 시절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나는 요즘 꽤나 느리게 달리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힘차게 질주하고 싶은데, 저질 체력 때문인지 덥고 습해진 날씨 때문인지 몸이 다시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잘만 내던 속도에서 힘듦을 느끼고 자꾸만 느려지는 요즘이다.
여태 더디더라도 꾸준히 성장해 왔던 나이기에 부쩍 부진해진 달리기 실력의 원인은 아마도 여름 날씨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조금만 뛰어도 금세 숨이 차고, 몸과 바닥이 하나가 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어제는 무리하지 않기 위해 거의 걷다시피 뛰었다. 난생처음 9분 페이스로 뛰었더니 그다지 힘들지 않고 오랫동안 뛸 만했는데, 달리기 시작한 지 20분 정도쯤 고비가 오긴 했다. 이대로 멈출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로 했던 40분 달리기를 마치고 나자 무릎이 뻐근했다. 평소 이보다 더 빨리 뛰었던 때에도 무릎이 아팠던 적이 없는데. 너무 빨리 뛰어도 탈이 나지만 너무 느리게 뛰어도 무리가 되는 걸까? 40분이나 뛰었지만 그다지 숨이 차거나 땀이 많이 나지 않아 몸도 마음도 덜 개운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무덥고 습했다.
여름 날씨에 축 처질 몸을 대비해서 미리 식염 포도당과 고카페인 드링크를 사놓았는데, 요즘 뛰는 시간대가 저녁 7시 이후여서 그런지 괜히 늦은 시간에 먹었다가 잠을 설칠까 봐 구석에 방치하게 되었다. 역시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건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언제까지나 계속 해낼 것만 같은 열정 넘치던 마음이 여러 변수 앞에서 한 풀 기세가 꺾이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무기력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달리는 이유는 멈출 이유가 없어서,라는 말을 스스로 내뱉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달리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고 들었다. 장거리 달리기로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쫓아갔다고도 하니까.
게다가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큰 단점을 몸소 깨달았기에 더더욱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무기력하게 지낼수록 더 깊은 무기력에 빠지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했다.
러닝을 오랫동안 사랑해 온 사람들을 보면 날씨에 굴하지 않고 달린다. 장마에 온몸이 젖어 축축한 신발로 내달리든 한겨울에 얇은 옷을 겹겹이 껴 입고 하얀 입김을 뿜어 가며 달리든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날씨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밖으로 나가게 하는 걸 보면 역시 러닝은 중독성이 있는 게 분명하다.
요즘 부쩍 러닝 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그중 나도 한 사람이다. 운동복을 갖춰 입고 공원을 뛰다 보면 맞은편에서든 뒤에서든 똑같이 주로 위를 내달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과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내적 친밀감이 든다. 동지를 만난 느낌이랄까?
다시 어제의 달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9분 페이스로 달리고 있는 내가 무심결에 부끄럽다고 느껴졌다. 이렇게 달팽이 기듯 느릿느릿 기어가서야 폼이 나나?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렇게 스스로에게 빨리 뛰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여 놓고서는 어느새 '멋진' 러너로 비추어지고 싶었나 보다. 도대체 누구에게 멋져 보이고 싶었기에.
이런 걸 보면 나는 정말 인정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잠깐 속력을 내 보았는데 그마저도 8분 30초대였다. 그래서 그 후로는 그냥 포기하고 다시 달팽이 달리기를 계속했다. 9분 페이스면 사실 거의 빨리 걷기 수준의 속도이지만 아무리 느리더라도 걷는 것보다는 뛰는 행위가 더 건강에 이롭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 말을 믿고, 느린 달리기를 끝까지 마쳤다.
아마 이번 여름 내내 이렇게 느린 달리기를 계속한다 하더라도, 답답한 마음에 빨리 속력을 내어 보려다 무력한 마음에 빠진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여름이 다 지나갈 때까지 달려 보려고 한다. 이왕 시작한 운동인데 사계절은 다 겪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다.
지금은 밖에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비 찬스로 오늘은 러닝을 쉬었다. 마침 잘 됐지. 평소보다 유난히 피곤했는데 합법적으로(?) 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최애 계절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습한 더위에 이 계절이 어서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씩 움트고 있다. 뜻하지 않게 게으름을 피우게 되는 것도 다 여름 탓이라고, 그렇게 애꿎은 날씨 탓을 해 보지만 어찌 되었건 나는 앞으로도 계속 멈추지 않고 뛰어 보려고 한다.
달팽이는 느리더라도 제 갈 길은 쭉 가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