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로사의 스타일로 그린 <인물들이 있는 산악 풍경> 17세기 이후. Image source: The National Gallery, London.
18세기 영국의 주요 문화 논쟁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그림과 시학(Poetry)의 라이벌적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영국의 초상화가이자 문필가인 조나단 리차드슨(Jonathan Richardson, 1667-1745)은 『회화론 The Theory of Painting』 (1715)에서 회화가 문(文)을 능가하는 수준의 인문학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는 언어가 인간이 가진 무한대적인 생각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형태로 표기하기에는 불안전한 반면 그림은 화가가 의도하는 감정을 모두가 공감하는 명확한 상태로 그려낸 것이기에 회화가 시학보다 우세하다고 논했습니다. 덕분에 당시 영국인들에게 시는 일종의 ‘말하는 그림’ 정도로 인지되었고 회화가 시에 버금가는 예술의 영역이라는 주장은 더욱 활성화되었습니다.
니콜라스 푸생 <그리스도의 세례 > 1641/1642. Image source: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 C.
영국에서 가열된 그림과 시의 라이벌 구도는 화가와 시인을 필적하게 했고 더불어 풍경화와 목가시를 비교하여 감상하게끔 하였습니다. 때마침 영국인들은 클로드 로랭, 살바도르 로사, 그리고 니콜라스 푸생의 시적이며 암시적인 이탈리아 풍경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그림을 고대목가시와 연결 지어 감상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영국미술가들로 하여금 가장 시적인 형태로 자연의 모습을 묘사한 풍경화를 그들의 기존 미술양식에 접목시키는 시도를 하게끔 합니다.
(좌) 안소니 반 다이크 <캐서린 하워드> (1638) (우)<제프리 허드슨 경과 함께 있는 여왕 헨리에타 마리아> (1633) 출처: 워싱턴 네셔널 갤러리
그런데 17세기 이전의 영국은 유럽 다른 나라 화가들의 손을 빌려 왕실 초상화 정도를 제작하며 이렇다 할 양식적 특성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해상무역의 주역이자 19세기 대영제국의 발판을 마련하는 18세기 영국 입장에서는 자국을 대표하는 미술양식을 확립하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장르를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지요. 비록 초상화가 어느 정도 발달되어는 있었지만 유럽미술 전통에서 초상화는 종교화나 역사화에 비해 그 예술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하위 장르에 속해 왔기 때문에 초상화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조지 스터브스 <샤프 포클링턴 대령의 가족초상> (1769) 출처: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이에 영국은 아주 교묘하고 기발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들이 비교적 대중적으로 제작하던 초상화 장르에 타국 미술의 여러 요소들을 유입시켜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그들 미술의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한 것이죠. 이런 노력 중 가장 눈에 띄는 형태가 바로 초상화와 풍경화의 만남이었습니다. 드디어 영국 초상화에 이탈리아풍의 풍경화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Cicely Davies, “Ut pictura poesis,” The Modern Language Review 30, no. 2 (April 1935)
Elizabeth Wheeler Manwaring, Italian Landscape in Eighteenth Century England (New York: Russell and Russell, 1965)
Jonathan Richardson, An Essay on the Theory of Painting (Yorkshire: Scolar Press,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