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버세이션 피스(conversation piece, 편의상 가족화로 명명함)는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여가를 즐기는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18세기 영국미술의 대표장르이다. 전통적으로 초상화에 강세를 보였던 영국미술은 본인들이 익숙한 장르였던 초상화에 새로운 외래 장르인 풍경화를 도입하여 ‘초상화 속 풍경화’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면서 변화를 꾀하였고 이를 가장 잘 반영한 장르가 가족화였다. 그리고 이런 그림들은 주로 초상을 의뢰한 이들의 집안 응접실을 배경으로 그려졌기에 당시 영국 중산층 사이에서 유행하던 인테리어나 의복 등 시대를 대변하는 오브제들이 포함되어 있어 일종의 그림문헌과 같은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좌) 반 다이크의 <찰스 1세 가족화>, 1632, Royal Collection Trust (우) 반 다이크의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 초상화>, 1633, 워싱턴 네셔날갤러리
가족화가 영국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할 무렵인 18세기 전반은 미술 양식적으로 바로크와 로코코가 혼재하던 흥미로운 시기였다. 물론 초상화 장르에서 말이다. 특히 왕실 초상화는 주로 외국 화가들에 의해서 제작되던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대표적 화가로는 벨기에 출신인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를 들 수 있다. 반 다이크는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그의 초상화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1632년 찰스 1세(Charles I, 재위기간 1635-1649)의 궁정화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전까지 영국 왕실에서 제작되던 다소 꼿꼿하고 어색한 모습의 매너리즘 양식적 초상화 시대를 종식시키고 자연스럽고 우아하며 화려한 바로크 초상화 시대를 열었다. 반 다이크는 영국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초상화 양식은 고드프리 넬러(Godfrey Kneller, 1646-1723)를 이어 조슈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 1723–1792)나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와 같은 영국 왕실화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드프리 넬러의 <Charles Beauclerk (1670–1726), Duke of St. Albans> ca. 1690–95, The Metropolitan Museum
(좌) 레이놀즈 <Captain George K. H. Coussmaker> 1782 (우) 게인즈버러 <Mrs. Grace Dalrymple Elliott> 1778, MET
로코코 스타일로 그려진 필립 메르시에의 <벨튼 가족화>, 1725-26. 이미지 출처: Wikipedia
왕실 초상화가 여전히 강렬한 색채의 드레이프를 캔버스 한쪽에 드리우고 그 옆으로 우아하고 화려한 인물을 그려 극적인 효과를 끌어낸 반 다이크식의 초상화 스타일을 따르고 있었다면 일부 귀족층과 중산층 사이에서는 로코코 스타일의 초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대가인 프랑수아 부셰 (François Bouche, 1703-1770)나 장 앙투안 와토 (Jean-Antoine Watteau, 1684-1721) 등을 상기시키는 장식적이면서 작고 다소 귀여운 모습의 인물묘사가 특징인 이런 초상화들은 주로 가족화의 형태로 많이 제작되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당시 앙투안 와토의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가 일종의 가족화와 비슷한 성격의 장르로 영국에 소개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페트 갈랑트는 18세기 프랑스 귀족들이 궁정 연회복을 입은 채 전원과 같은 야외에서 개최했던 사교 모임을 주제로 한 회화인데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파 화가인 조르조네나 티치아노가 그린 전원 목가적인 풍경화의 성격을 띠면서도 로코코의 장식적인 특성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여러 명이 모여서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어 당시 영국인들에게 가족화의 일종으로 이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 밥티스트 파테 <페트 갈랑트>, 1721-5. 이미지 출처: 런던 네셔날갤러리
장 밥티스트 파테 <전원 콘서트>, 1734. 이미지 출처: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또한 1732년 영국으로 이주해 프랑스 로코코 스타일을 전파한 삽화가 휴버트 그라벨롯(Hubert Gravelot, 1699–1773)이 당대 베스트셀러였던 사뮤엘 리차드슨(Samuel Richardson, 1689–1761)의 소설 『파멜라 Pamela, or Virtue Rewarded』(1740)의 삽화를 제작하였는데 이 삽화 역시 가족화와 비슷한 미술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가족화는 영국인들에게는 익숙한 초상화의 한 부류이기도 하면서 당시의 여러 가지 유행들을 접목시켜 볼 수 있는 장르였다. 그 결과 많은 화가들이 런던에서 성공이 보장된 초상화가로 데뷔했고 아더 데이비스(Arthur Devis,1712–1787)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좌) 소설 파멜라의 삽화 (우) 아서 데이비스의 <리차드 불 가족화>, 1747. 이미지 출처: Wikipedia
참고문헌
Polite Society by Arthur Devis, 1712–1787: Portraits of the English Country Gentleman and His Family (Preston: Harris Museum and Art Gallery,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