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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udia Park Jan 06. 2024

부패한 딜레탕티즘

호가스의 <유행결혼>

영국의 풍자화가 윌리엄 호가스는 그의 작품을 통해 일부 상류층의 예술에 대한 무분별한 취미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예술이나 학문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 없이 향락적으로 문예를 도락(道樂)하는 부유한 상류층의 쾌락적 행태는 호가스의 <유행결혼 Marriage à la Mode>(1743-1745) 시리즈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총 여섯 장면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사회적 지위나 부를 얻기 위해 행해진 잘못된 정략결혼과 이들의 부패한 딜레탕티즘(dilettantism)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Marriage A-la-Mode: 1, The Marriage Settlement, the National Gallery, London


파산한 백작과 어느 이름 없는 도시의 부유한 상인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 그들의 아들과 딸을 정략결혼시킵니다. 나이 든 백작이 죽자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게 된 젊은 백작 부부의 사치와 방종은 심해졌고  바람, 음주, 도박 등과 같은 악덕을 저지르면서 결국에는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됩니다.


Marriage A-la-Mode: 4, The Toilette, the National Gallery, Londo


<유행결혼>의 네 번째 장면인 <몸단장 The Toilette>에서는 백작부인이 된 상인의 딸이 지인들을 그녀의 침실에 모아놓고 래비(Levee)라는 아침 의식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영국 귀족 사회에서 과거 프랑스 절대 왕정시대 왕실에서 행하던 의식을 흉내 내던 당시의 유행을 풍자한 것으로 외국문물, 특히 프랑스 문화와 생활방식 그리고 사치품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을 비판하고 경계하고자 한 것이라고 합니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 <주피터와 이오Jupiter and lo> (1532-33),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이 방은 여러 이탈리아 대가들의 작품으로 가득하지만 백작부인을 포함한 그 누구도 그녀의 방에 걸린 미술작품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네요. 호가스는 백작부인의 침실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코레죠의 <주피터와 이오> (이 작품은 코레죠가 제작한 ‘주피터 연애사건’ 네 가지 중 하나로 이오를 유혹하기 위해 구름으로 변신한 주피터가 이오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와  같은 비정상적 성욕을 주제로 한 그림들과 주변의 널브러진 아프리카 조각상들 그리고 부도덕한 백작부인과 이곳에 모인 이상한 인물들의 조합을 통해 소위 엘리트층으로 여겨지던 상류층의 타락한 도덕성과 문란한 성생활 그리고 외국문화에 대한 무분별한 딜레탕트적 태도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사치스럽고 부적절한 주제의 그림들은 등장인물의 부도덕성을 상징하는 장치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18세기 영국을 대표할 수 있는 교양문화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호가스의 작품에서 묘사된  상류층의 타락한 도덕성과 외국문화에 대한 그들의 무분별한 태도는 새로운 엘리트층으로 성장한 18세기 영국 중산층에게는 경종이었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상류층 신분은 오직 출생으로만 부여받을 수 있는 특권이라 여겨졌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이런 의식은 변화하게 됩니다.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란 단순이 부여되는 것이 아닌 배움을 통해 습득된 교양 있는 태도와 깨어있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The Society of Dilettanti [April 1821] by William Say,  Royal Academy of Arts


덕분에 과거 일부 특권층에게만 허락되던 배움은 이제 더 이상 그들만의 소유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엘리트적 배움이란 여전히 고전문학과 예술등에 대한 탐구를 필요로 했고 이는 딜레탕트적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에 배움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꾀하고자 했던 새로운 엘리트층은 부패하고 타락한 종전의 상류층과는 다른 좀 더 절제된 행동강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분별한 딜레탕트적 태도를 견제하면서도 배움을 통해 예술에 대한 수준 있는 안목을 습득해야만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기존 특권층이 향유하던 역사화나 종교화가 아닌 새로운  장르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풍경화였습니다. 때마침 풍경화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그랜드 투어의 영향으로 영국사회 전반에 퍼져있었고 18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일부 중산층 자제들도 교양 교육의 일환으로 그랜드 투어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방문했던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풍경화는 본국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일종의 기념품이자 높아진 그들의 문화적 소양을 대변하기에 적절했기에 풍경화에 대한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여행을 다녀오든 아니든 말이지요.   



참고문헌

Ching-Jung Chen, “Portraying Politeness: The Early Georgian Conversation Piece and Its Patrons,” Visual Resources 27, no. 3 (2011)

Jason M. Kelly, The Society of Dilettanti Archaeology and Identity in the British Enlightenment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9)

Lawrence E. Klein, “Politeness and the Interpretation of the British Eighteenth Century,” The Historical Journal 45, no. 4 (December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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