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9편_검은 판사와 악의 분노
2015년 5월 19일, 오후 13시 5분
“응급 환자다! 어서 빨리!!”
“중상입니다!”
응급실에 비상이 걸렸다. 제일 병원 응급실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튀어 나왔다. 흰색 가운이 바람에 휘날렸다. 순백의 흰색이 강렬했다.
생명을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응급실 밖 구급차 진입로에 경광등이 번쩍였다. 좌우로 다급하게 움직이는 경광등이 사태의 심각성을 계속해서 알렸다.
차 문이 열리고 구급 대원들이 내렸다. 뒷문을 열고 환자를 꺼냈다. 환자는 50대 초반 여성이었다.
“이런!”
달려온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딱 보기에도 중상이었다. 의식이 없어 보였고 이미 많은 피를 흘렸다.
입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렸다. 심한 내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선혈이 상의 카라와 가슴을 적셨다. 그뿐만 아니었다. 치마에도 많은 피가 묻어 있었다.
붉디붉은 피가 사태의 위급함과 함께 참혹함을 동시에 알렸다.
“자, 서두르자!”
구급 대원들이 이동 침대에 여성을 실었다. 그리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같이 달리며 환자를 살피던 의사가 급히 말했다.
“환자 혈압이 어떻게 되죠?”
구급 대원이 급히 답했다.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아주 위중합니다. 심한 장기 손상이 우려됩니다. 뇌도 위험해요!”
의사가 간호사에게 외쳤다.
“김선생님, 응급 수술을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 여자가 큰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정연지였다. 나이는 52세였다.
사고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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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나온 여인, 정연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화창한 5월이라 기분이 무척 좋은 거 같았다. 그녀는 중간 키에 통통한 몸매였다.
정연지가 인적이 드문 인도를 걷고 있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저 앞서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세단이 울창한 가로수를 지나더니 갑자기 속도를 냈다. 차의 굉음이 들렸다. 고막을 강타하는 불길한 소리였다.
“어?”
굉음에 놀란 정연지가 주춤했다.
바로 그때 세단이 인도를 침범했다.
“악!”
정연지가 차에 치여서 3m를 날아갔다.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 문이 활짝 열리더니 키가 큰 남자가 차에서 튀어나왔다.
검은 모자와 검은 마스크,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블랙맨이었다.
블랙맨이 한 손을 높이 쳐들었다. 손에 긴 칼이 있었다. 칼날이 강렬한 햇빛을 받자 섬뜩한 섬광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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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지 긴급 수술이 시작됐다. 그렇게 그녀가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서울 문일 대학교 문과대학 3층 301호에서 교양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강의실에 들렸다.
“장편 소설을 쓰려면 무엇을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까요? 여러분,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세요.”
교양 필수, ‘장편 소설의 이해’를 담당하는 박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이 잠시 생각하다가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선생님,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할 거 같아요. 그중에서도 좋은 소설책을 골라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무엇보다 플롯이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매혹적인 플롯이라는 작법서도 있잖아요.”
“책보다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좋은 수업을 받아야 해요. 지금 우리처럼요!”
그 말을 듣고 박교수가 씽긋 웃었다.
그러자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맞아요! 선생님이 제일 중요해요.”
“선생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게 제일 중요해요.”
학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수업이 참 재미있는 거 같았다.
박교수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명한 소설가이자, 교육자였다. 그가 고개를 끄떡이고 말을 이었다.
“모두 좋은 말입니다. 지금부터 제 생각을 말할게요.”
학생들이 귀를 쫑긋했다. 그들 대부분 박교수 소설을 읽었다. 박교수는 추리 미스터리 소설의 대가였다.
그의 대표작은 절름발이 탐정, 윤호였다.
윤호는 어릴 적 사고로 한 발을 심하게 절었다. 한 발을 저는 남자가 명석한 두뇌로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잡았다. 그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했다.
그의 책을 읽으면 밥 먹는 걸 잊을 정도로 푹 빠졌다.
박교수가 말했다.
“장편 소설은 한마디로 말해, 인생을 긴 호흡으로 펼치는 겁니다. 단편 소설은 인생을 짧게 펼치는 거고요.
인생을 긴 호흡으로 펼치려면 무엇보다도 인생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 인생 경험 중에서 뼈아픈 경험이 소설 창작의 씨앗이 됩니다. 좌절, 분노, 두려움, 슬픔, 억울함이 소설 창작의 원천이 돼서, 한 명의 소설가가 탄생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소설가는 마음에 품은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마음껏 펼치고 비상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군요.”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할게요. 잘 들으세요.
인생사는 역시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느꼈던 뼈아픈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할 때 예기치 못했던 일이 생겼습니다.
제 집필을 방해하는 자들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자들이 조직적으로 괴롭혔습니다.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명이 떼 거지로 몰려들었습니다.
저를 교묘한 수법으로 모욕하고 조롱했습니다. 제가 좌절하기만을 바라며 제 작품과 저를 무참하게 난도질했습니다.
아마데우스 영화에서 천재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살리에르를 보는 듯했습니다.”
“세상에!”
학생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더 열심히 펜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자유자재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견딜 수 없는 조롱과 탄압을 당하자, 소설 창작이 정말 쉬워졌습니다.
세상사라는 게 새옹지마입니다. 견딜 수 없는 모욕을 이겨내며 신이 될 수 있지만, 이겨내지 못하면 죽습니다.”
박교수가 과거를 회상하다가 말을 멈췄다. 아픈 기억이자, 인생의 쓰디쓴 경험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결과적으로 저를 싫어하고 방해하는 자들이 오히려 저를 도와줬습니다.
그들의 끝 모를 시기와 질투, 훼방, 조롱, 모욕이 일시적으로는 저를 나락으로 떨어트렸지만, 더 떨어질 수 없는 밑바닥에서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한 단계, 두 단계 계속 성장했습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억누르며 용기를 내서 깊디깊은 구렁텅이를 올라가 천신만고 끝에 깊은 수렁 속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철옹성 같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나의 길과 내 저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의외란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교수의 말은 그들이 예상한 말이 아니었다.
소설 작성 비법이나 요령, 숨겼던 노하우를 말할 거라 같았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입에서 나왔다.
그건 시기와 질투의 소용돌이였다.
이를 극복한 선생님이 말했다.
인생의 쓰디쓴 아픔이 소설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박교수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 같았다.
“여러분, 장편 소설을 쓰고 싶으면 … 다른 데서 찾지 마세요. 여러분이 느끼고 경험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작품이나 기법서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외부의 것은 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가슴 뭉클하고 뼈저리게 아픈 추억이어야 합니다. 쓰디쓴 고통일수록 더욱 좋습니다.”
학생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명작을 쓴 유명작가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 박교수는 그게 아니라고 단언했다.
“소설은 갈등의 예술입니다. 갈등은 단편 소설보다는 장편 소설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서두에 갈등을 제시하고 이를 해결해야 소설입니다. 제시한 갈등이 마지막까지 해결되지 않거나 엉뚱한 거로 해결됐다고 우기면 안 됩니다.
소설을 쓰려면 먼저 개성이 뚜렷한 인물과 그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배경을 만드세요. 그런 다음 그 속에 작은 갈등을 던지세요.
이는 연못에 작은 돌멩이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파문을 만드세요. 그 갈등이 씨앗이 돼서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 줄 겁니다.”
학생들이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장편 소설은 위대한 마술입니다. 그것도 10분, 30분에 끝나는 마술이 아니라 며칠에 걸쳐서 공연하는 장기 공연과 같습니다.
장편 소설가가 되려면 능수능란한 마술사가 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술을 무작정 따라 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스스로 창작한 마술에서부터 시작하세요.
창작은 기존의 걸 배우고 응용하면서 발전합니다. 기존의 것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작가의 생각을 읽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겁니다.”
“소설이 마술이에요?”
“네, 소설은 마술입니다. 모든 예술은 마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마술의 원천은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루하루 느끼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그중에서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버리지 마세요. 그 감정을 승화해서 소설에 투영하세요.
그러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소설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1차 적으로 자기만족입니다. 다른 사람이 좋아한다면 그건 덤이죠. 매우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그렇군요.”
“남을 위해서 쓰는 게 아니네요. 그동안 제가 잘 못 알았네요.”
학생들이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이는 인생의 교훈과도 같았다. 소설 창작은 결국, 쓰디쓴 인생의 고백서와 같았다.
10분 후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미있고 즐거운 수업이었다.
교수와 학생들이 강의실을 비웠다. 강의실에 여학생 둘만 남았다.
강의실이 한적해지자, 여학생들이 빙긋 웃었다. 가방을 열더니 자수 세트를 꺼냈다. 바늘을 들고 장미꽃 자수를 시작했다. 붉고 탐스러운 장미 두 송이가 활짝 피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여학생 둘이 자수 삼매경에 빠졌다. 한 여학생이 열심히 수를 놓다가 슬며시 친구의 자수를 봤다. 그러다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슬아, 어쩜, 그리 빨리 바늘을 움직여.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이슬이라고 불린 여학생이 실실 웃었다. 그녀가 친구에게 말했다.
“혜림아. 난, 어릴 적부터 자수를 시작했어. 엄마가 어떻게 하는지 일일이 가르쳐줬어. 그래서 능숙해. 이제는 엄마보다 손이 빨라.”
“아, 그렇구나. 엄마가 … 보험 설계사라고 했잖아. 보험은 직업일 뿐이고 사실은 자수 달인이셨던 거야?”
“응, 엄마는 자수 달인이야. 자수뿐만 아니라 피규어도 잘 만드셔.”
“피규어라고?”
“응, 나무를 깎기도 하고, 찰흙 같은 거로 미인상을 만드셔. 모두 취미로 하시지만, 정말 대단한 솜씨야. 우리 엄마는 손재주가 정말 대단해.
나도 엄마 따라서 종종 피규어를 만들고 있어. 아직 엄마를 따라가려면 멀었어.”
“아, 그래서 너도 자수를 잘하는구나. 모전여전이네.”
“그런가? 하하하!”
자수를 잘하는 여학생이 크게 웃었다.
그녀는 문일대학교 영문과 2학년 윤이슬이었다. 키가 크고 말랐다. 긴 얼굴에 이목구비가 선명했다. 마치 고고한 학을 보는 듯했다.
두 여학생이 자수를 계속했다. 둘은 이후에 수업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취미 생활을 여유 있게 즐겼다.
둘밖에 없는 강의실은 무척 조용했다. 평온한 오후였다. 따뜻한 햇볕이 강의실을 비췄다.
그때 조용함을 깨는 벨소리가 울렸다.
삐리릭!
윤이슬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핸드폰을 들었다. 모르는 번호인 듯 주저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 정연지씨 따님이세요?”
“네? 정연지는 … 우리 엄마 이름인데요.”
“정연지씨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로 전화 걸었습니다. 정연지씨 따님이 맞으시죠?”
“제가 딸이 맞아요. 엄마가 … 사고를 당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제일 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고 있습니다.”
“으, 응급 수술이라고요?”
“지금 무척 위중한 상태입니다.”
“헉!”
윤이슬이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자수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그녀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머니가 큰 화를 당했다. 가방을 들더니 강의실에서 서둘러 나갔다.
“이슬아! 대체 무슨 일이야?”
친구가 급히 외쳤다. 윤이슬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강의실에 혼자 남은 친구가 심상치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분명, 응급 수술이라고 말한 거 같은데 … 아, 맞아. 엄마가 사고를 당했다고 말했어.
아이고! 이를 어째. 이슬이한테는 엄마 하나밖에 없는데.”
친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타까움을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