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원장은 마석에게 쉬라고 당부했다. 갑작스러운 손 떨림은 좀 쉬면서 술을 끊으면 좋아질 거라며 은근히 사직을 종용했다.
“그만 좀 쉬는 게 좋겠어. 카야마 선생.”
“…….”
마석은 고개를 숙일 뿐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결심했다. 더는 눈칫밥을 먹기 싫었다. 손이 떨려서 외과의를 더는 할 수 없었다. 이에 조만간 병원을 사직하기로 마음먹고 사직서를 준비했다.
오늘은 그가 마지막으로 당직 근무를 서는 날이었다. 며칠 뒤, 오랜 기간 근무했던 병원을 떠난다는 생각에 또 마음이 울적해져서 술을 찾았다.
책상 밑에 몰려 숨겨놨던 술을 찾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신세를 한탄했다. 그렇게 독한 술을 여러 잔 기울이며 취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는 헌병대 총사령관 관저입니다. 충격으로 졸도한 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총사령관의 수양 따님이 아프십니다. 의사 선생의 왕진이 필요합니다.”
전화를 받은 마석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에 휘청거렸지만, 빨리 움직여야 했다. 병원 안에 의사는 자기밖에 없었다.
전화는 헌병대 총사령관 관저에서 왔다. 그 전화를 무시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취기가 돌아서 비틀거렸지만, 급하게 가운을 입고 왕진 도구를 챙겼다. 이내 대기하고 있던 병원차에 올라탔다.
마석이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헌병 대원이 집 안에 있었다. 꼭 큰일이 생긴 거 같았다.
“맞아, 술 냄새.”
마석이 한 손을 들어 입을 꼭 막았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날 거 같았다.
그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주변을 둘러봤다. 옆에 하인이 있었다. 이에 급히 말했다.
“목이 마르네요. 물 한 잔 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하인이 물을 가져오자, 급하게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소매로 입을 닦고 헌병의 안내를 받으며 에리카의 방으로 향했다.
에리카 방에는 다나카와 야마모토, 요시코가 있었다. 그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에리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마석이 멈칫했다. 다나카를 보고 주춤했다.
갑자기 아버지 유언이 생각났다.
‘다나카가 테츠야가 신우의 원수’라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인기척이 들리자, 다나카가 고개를 돌렸다. 마석을 보고 입을 열었다. 예의를 갖춘 정중한 말이었다.
“의사 선생! 내 딸이 갑자기 실신했다오. 잘 봐주시오!”
“아! 네.”
마석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혹 술 냄새가 날까 봐 두려웠다. 이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서 침대로 향했다. 의사답게 에리카의 자세히 상태를 살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외상이나 출혈은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실신한 거뿐이었다. 마석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다나카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곧 괜찮아질 겁니다. 깨어나시면 드릴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오! 그래요.”
“그렇습니다.”
마석이 대답하고 이를 악물었다.
사실, 그는 다나카를 알고 있었다.
마석의 아버지 촌장은 경성에 온 후 다나카를 찾았다. 둘은 22년 전에 인연이 있었다. 촌장은 간도에서 벌였던 사업을 정리하고 더 큰 사업을 벌이기 위해 경성에 정착했다.
촌장은 충분한 사업 자금이 있었지만, 연고가 없는 외지인이라 여러모로 불리하나 점이 많았다. 그래서 고위 장교인 다나카를 찾았다.
다나카에게 돈을 대주며 그 뒤를 부탁했다. 특히 매년 명절이며 거액의 돈을 상납했다. 다나카가 뒤를 봐주기 시작하자, 촌장은 날개를 달았다. 경성에서도 알아주는 독보적인 쌀가게를 운영하게 되었다.
촌장의 사업이 번창하자, 다나카가 본색을 드러냈다. 바로 군수 물자 상납금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액수가 오르더니 이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오르고 말았다.
일제는 미국과의 전쟁으로 돈과 물자가 부족했다. 서민뿐만 아니라 경성의 부자들한테도 돈을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카야마 선생, 비행기를 상납해야 합니다.”
“네? 뭐라고요?”
비행기를 상납하라는 다나카의 요구에 촌장이 깜짝 놀랐다. 곧 터무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나카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조선인 사업가가 감당해야 하는 몫입니다. 천황 폐하의 보살핌 아래에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데 그 돈이 아깝습니까? 가네모토(김씨) 선생도 흔쾌히 돈을 상납했습니다.”
“그, 그렇기는 하지만 … 사정이.”
“뭐라고요?”
촌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정이 어렵다며 다나카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헌병대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 말았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풀려나 다나카가 원하는 만큼 돈을 낼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현금은 고리사채업자한테 빌려서 낼 수밖에 없었다.
마석은 헌병대로 끌려간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머니와 함께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다 아버지가 나온다는 연통을 받고 헌병대로 달려갔다. 거기에서 다나카를 처음 봤다. 연신 그에게 굽신거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언제나 당당했던 아버지가 비굴한 모습을 보이자,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나카는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헌병대의 수장, 총사령관이었다.
힘깨나 쓰는 경찰과 군인도 헌병대한테는 꼼짝도 못 했다. 헌병대한테 불경한 짓을 한다는 건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헌병대는 총독의 친위부대였다.
‘다나카!!’
마석이 끓어오르는 화를 참았다. 바로 앞에 다나카가 서 있었다. 아픈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마석이 생각했다.
‘이 모든 게 다나카 때문이야!
다나카 때문에 아버지가 고향에서 차마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거야.
신우가 복수심을 품고 아버지한테 나타난 것도 다나카 때문이야.
내가 거짓 밀고를 해서 덕대와 기철이 죽은 것도 다 다나카 때문이야.
이 모든 일은 다 다나카 때문에 벌어진 거야. 다나카만 없었다면, 이자가 마을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어!!’
마석이 결론을 내렸다. 다나카가 없었다면 평온한 일상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마석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솟아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자리를 피했다. 마침 방으로 들어온 하녀 수장, 아야코에게 처방전을 주고 곧장 방에서 나갔다.
“의사 선생이 어디에 있지?”
다나카가 마석을 찾았다. 에리카를 성심껏 진찰해준 의사한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그런데 옆에 있었던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석을 찾으려 할 때 에리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으으~!”
드디어 에리카가 깨어났다.
다나카가 급히 에리카에게 말했다.
“에리카! 괜찮니? 아까 일로 너무 놀랐구나. 아저씨가 미안하다. 조용히 처리했어야 했는데 ….”
“…….”
에리카가 답을 하지 않았다. 부모를 죽인 원수, 다나카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남았다. 그의 필적과 지문을 증거물과 대조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절차였다. 에리카는 어머니를 닮아 급하기는 했지만,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그녀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걱정을 끼쳐서 죄송해요.”
에리카가 분노와 원한, 의심을 애써 참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약이 왔다는 소식에 현관문으로 달려갔던 요시코가 약봉지와 물병을 들고 다시 방으로 향했다. 급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다가 그만 앞에 있는 병사를 보지 못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
쟁그랑!
약봉지와 물병이 떨어지면서 큰소리가 났다.
“악!”
순간, 에리카가 비명을 질러댔다. 큰소리에 놀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떨었다. 사토가 맞았던 총소리가 다시 들리는 거 같았다.
“이것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아픈 아가씨 앞에서!”
다나카 옆에 있던 야마모토가 벼락같이 화를 내며 요시코를 향해 성큼 걸어오더니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짝!
“아야!”
야마모토의 불같은 따귀를 맞은 요시코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때 가슴속에 고이 간직했던 봉투가 삐죽 튀어나오더니 밖으로 떨어졌다.
“이건 또 뭐야? 봉투?”
야마모토가 바닥에 떨어진 빛바랜 봉투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헉!”
요시코가 깜짝 놀랐다. 야마모토가 봉투를 들자 간이 콩알만 해졌다. 사토가 분명히 말했었다. 다나카가 에리카 부모님을 죽였다고. 그 증거가 바로 봉투 안에 있는 종이 두 장이었다.
야마모토가 봉투를 열었다.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편지를 꺼내려 했다. 요시코가 잽싸게 일어났다. 야마모토의 팔을 급히 잡으며 말했다.
“안 돼요! 보시면 안 돼요!”
“왜 안 되는데! 안에 뭐가 있는데?”
야마모토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한테 달라붙은 요시코를 떼어내려고 힘을 썼다.
요시코가 이를 악물었다. 야마모토의 팔을 꽉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봉투라고?’
이불을 뒤집어썼던 에리카가 봉투라는 말을 듣고 급하게 이불을 걷었다.
봉투를 야마모토가 들고 있었다. 에리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에리카의 얼굴을 보고 요시코가 급히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벗어나야 했다.
요시코가 얼굴을 붉혔다. 몹시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제 연애편지에요.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뭐! 연애편지라고? 네까짓 거한테 남자가 있다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재주가 용하구나!”
야마모토가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치더니 요시코를 거세게 밀쳐버렸다.
“아이고!”
요시코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빌면서 간청했다.
“야마모토 대좌님, 명호 오빠가 준 편지에요. 제발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뭐! 명호라고?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야마모토가 말을 마치고 봉투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기 시작했다.
“헉!”
순간, 에리카의 몸이 굳어버렸다. 차마 이 광경을 볼 수 없어서 눈을 꼭 감아버렸다.
요시코도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야마모토가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반쯤 꺼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라는 첫 글자를 보였다.
그러자 야마모토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말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라고? 하하하! 연애편지 맞네. 그래 좋아! 젊은 나이에 연애도 해야지. 요시코 재주가 좋아.”
야마모토가 요시코를 비웃기 시작했다. 종이를 봉투에 다시 넣더니 바닥에 떨어뜨렸다.
“감사합니다.”
요시코가 재빨리 말하고 봉투를 주워서 가슴 속에 품었다. 다시는 떨어뜨리지 않을 요량인지 옷고름을 단단히 동여맸다.
“연애편지”라는 야먀모토의 말에 에리카가 눈을 번쩍 떴다.
요시코가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주워서 가슴에 넣는 걸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야마모토의 표정을 살폈다. 동요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편지 앞부분만 읽고 나머지는 읽지 않은 게 분명했다.
‘다행이다.’
에리카가 참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요시코와 눈빛을 교횐했다. 그렇게 서로 위로했다.
*
마석이 관저 밖으로 나가서 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다나카라는 모든 일의 원흉을 보고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그자 때문에 아버지가 출세했지만, 또한 그자 때문에 아버지가 완전히 몰락했다.
높디높은 모래탑에 썰물이 들어오자, 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신우한테서 겨우 살아남은 자신과 풍에 걸린 어머니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제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젠장!!”
마석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가 어머니를 보살피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인생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뭔가 획기적인 게 필요했다. 답답한 심정을 한 방에 달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차가 병원을 향해 출발했다.
마석이 생각에 잠겼다.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신우가 찾아왔던 날을 회상했다.
그날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불을 지르고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에게 유언을 남겼다. 신우의 복수를 도와주라는 말이었다.
‘신우의 복수를 도와주라!’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마석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목에 커다란 가시가 탁 걸린 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