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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간도에서 온 사나이 1_53_지문, 필적 대조

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by woodolee Feb 18. 2025

“언니, 여기 메모지하고 만년필, 밀가루에요.”


요시코가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물건을 건넸다.


에리카가 손수건과 메모지를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에 메모지, 밀가루, 만년필을 놓고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서 다나카가 쓴 각서를 꺼내 그 필적을 메모지의 필적과 대조했다.


에리카의 두 눈이 바삐 움직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 종이의 필적이 굉장히 유사했다.


잠시 후, 에리카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래! 다나카가 이 각서를 직접 쓴 게 맞아. 같은 글씨체야.”


다음은 지문 대조였다.


에리카가 하얀 장갑을 끼고 만년필을 들었다. 다른 손으로 밀가루 통을 들더니 만년필을 향해 들이부었다.


하얀 가루가 만년필을 덮었다.


“화장 솔 좀 줄래.”


에리카의 말에 요시코가 급히 화장대로 달려가 화장 솔을 꼭 잡았다. 화장 솔을 에리카에게 건넸다.


에리카가 침을 꿀컥 삼켰다. 마지막 조사였다. 두 지문이 같다면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녀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떨리는 손으로 화장 솔을 잡더니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털었다. 만년필에서 밀가루가 떨어지자, 지문 자국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왔다!”


지문을 발견한 에리카가 급히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서 돋보기를 꺼냈다.


각서의 지장과 만년필의 지문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에리카가 두 지문을 꼼꼼히 살폈다.


3분 후 결론을 내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엄지손가락 지문이 일치했다.



봉투에 담긴 각서는 다나카가 직접 쓴 게 맞았다. 사토의 협박 때문에 쓴 각서였지만 진실의 기록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리카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언니!”


요시코가 불안한 듯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물 좀 먹을래요?”


요시코가 말을 마치고 물병을 찾았다.


그때! 에리카가 두 주먹을 꼭 움켜쥐더니 비통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에리카의 어머니를 탐해서 부모님을 모두 죽인 원수를 여태까지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에리카는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다.


밖에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에리카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내내 감시했다.


만약 울음소리를 듣는다면 무슨 일이 생겼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들이닥칠 것이 뻔했다.


“언니!”


요시코가 울먹이며 말했다. 소리죽여 울고 있는 에리카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격하게 흔들리는 가녀린 어깨를 통해 그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 거 같았다. 이에 언니의 두 손을 꼭 잡아주고 다독여주었다.


“언니 잘못이 아니에요. 힘을 내세요. 언니!”


요시코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봤던 한 남자의 뒷모습이 떠 올랐다.


요시코가 13년 전 과거로 돌아가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에리카의 부모님이자, 수양 부모님을 죽인 그자가 슬쩍 고개를 돌렸던 게 떠올랐다.


그 모습은 바로 다나카였다.


매일 매일 보던 그 얼굴이었다.


요시코가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왜 이제야 기억이 떠올랐나!’ 하면서 가슴을 마구 내리치며 흐느꼈다.


어리숙한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갈 곳 없던 그녀를 수양딸로 받아주고 친자식처럼 돌봐주던 에리카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원수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요시코가 작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다 내 탓이에요. 그날, 다나카를 알아보지 못한 다 내 탓이에요.”


요시코가 에리카를 껴안고 흐느꼈다. 그렇게 두 처자가 한동안 소리죽여 울었다.



*



에리카가 눈물을 닦고 단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요시코에게 말했다.


“어떡하지?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할까? 언론에 알릴까?”


요시코가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경찰이요? 헌병대가 경찰보다 한참 위에 있어요. 경찰들이 헌병 대원을 보면 꼼짝 못 하더라고요. 경찰은 소용없을 거예요.”


“그럼 언론에 알려야겠네. 밖에 나가서 이 편지를 세상에 알려야 해. 신우씨에게 도움을 청하면 분명 도와줄 거야.”


“그런데 어떻게 밖으로 나가죠? 언니는 방에서 나갈 수 없고, 저도 집 밖으로는 나갈 수 없어요. 어떻게 신우 씨에게 연락하죠?”


에리카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고심하다가 무언 가를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난 지금부터 단식할 거야. 나나코한테 가서 내 말을 전해.

학교에 가서 강의해야 하는데, 날 잡아 가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해, 이렇게 새장의 새처럼 감금하면 풀어줄 때까지 밥을 먹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해.

나나코는 다나카의 심복이니, 다나카한테 분명 보고할 거야.”


“네에? 언니, 단식하겠다고요? 그걸 어떻게 해요? 너무 힘들 텐데. 지금도 말랐는데.”


“현재, 이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다른 방법이 없어. 다나카와 싸우려면 목숨을 걸어야 해. 아주 독해져야 해! 그자는 … 악마야!”


요시코는 단식투쟁이라는 에리카의 결심을 말리려 했지만,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하녀 수장, 나나코를 찾아갔다.


그렇게 에리카의 단식투쟁이 시작됐다.


이 소식은 들은 다나카가 크게 노했다.


“뭐라고? 에리카가 단식투쟁을 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그동안 오냐오냐 다 받아줬더니 감히 나에게 대들어! 이번에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으으으~!”


다나카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매번 에리카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에리카가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안다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이에 명령을 내렸다.


“에리카를 관저 밖에 있는 별채로 옮겨! 지금 당장!! 그리고 철저히 감시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명령을 전하겠습니다.”


나나코가 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별채는 높은 담벼락을 둘러싸인 3층짜리 건물이었다. 한동안 사람들이 살지 않은 한적한 곳이었다.


에리카는 별채에서도 꼭대기인 3층 방에 갇혔다. 그곳은 으슥한 곳이었고,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밤에는 차디찬 냉기가 스며드는 감옥 같은 곳이었다. 궁궐의 냉궁과 같았다.


별채 앞에 작은 초소가 새로 세워졌다. 병사 여러 명이 새로 배치됐다. 별채 담벼락과 별채 정문을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에리카의 탈출을 막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그렇게 암울한 시간이 흘러갔다.


에리카가 단식투쟁을 선언한 지 만 하루가 지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식음을 전폐했다.


나나코한테 이 소식을 들은 다나카가 어찌할 줄 몰라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가 생각했다.


‘이를 어떡하지? 저러다 에리카가 잘 못 되면 큰일인데? 정신 차리라고 별채에 가둔 건데 … 더 화를 돋운 것 같은데.’


다나카가 집무실을 서성였다. 마음이 꽤 무거워 보였다. 옆에 있던 야마모토가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총사령관님이 잘 타이르면 아가씨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요?”


야마모토의 말에 다나카가 고개를 가로젓고 답했다.


“그럴 리가? 내가 미워서 단식하는데, 내 말을 들을 리가 있나!”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가씨를 설득해야겠네요. 저렇게 며칠간 식사를 거르면 몸에 큰 이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맞아! 그게 걱정이야. 건강을 해치면 어떡해!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해. 벌써 하루 동안 밥을 먹지 않았고 물도 먹지 않았어. 이러다가 큰일 나겠어. 그렇다고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고 이를 어떡하지?”


그때 야마모토가 아! 하며 탄성을 질렀다. 좋은 수가 생각이 난 거 같았다. 그가 말했다.


“총사령관님, 예전에 마에다 쇼타가 아가씨 지도교수였다고 하셨죠. 아가씨가 그자를 존경한다고 말씀하셨고요.”


야마모토의 말에 다나카가 급히 답했다.


“그렇지! 마에다가 있었지. 그래, 마에다라면 에리카를 설득할 수 있을 거야. 최소한 밥 한술은 먹게 할 수 있을 거야. 야마모토, 마에다는 지금 어디에 있지?”


“지금 사령부 지하 감옥에서 있습니다.”


“좋다! 당장 마에다를 관저로 데려와! 에리카를 잘 설득하면 무혐의로 바로 풀어준다고 해.”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야마모토가 절도 있게 경례하고 밖으로 나갔다.


마에다는 다나카의 관동군 시절 부하였다. 어린 소년과 어머니를 구하려고 하극상을 저질렀던 한심한 자였다.


이후 마에다는 동경에 자리 잡은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에리카는 그의 애제자였다.


다나카는 하극상을 저지르고 에리카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 준 마에다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가 꼭 필요했다. 에리카의 단식투쟁을 막을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



마에다가 지하 감옥에서 풀려났다. 차에 실려 관저로 향했다.


관저로 들어가기 전, 경비를 책임지는 경호 부대를 먼저 들렀다. 경호 부대는 관저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에서 기다려.”


병사의 말에 마에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초를 겪은 듯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다음 차례는 철저한 몸수색이었다. 이상이 없으면 부대 책임자를 만나서 지시 사항을 숙지해야 했다.


모든 조치가 끝나면 헌병의 엄중한 감시 속에 헌병대 총사령관 관저로 들어가야 했다.


마에다가 경호 부대에 도착해 몸수색을 받자, 부대 책임자인 상사가 막사에서 나왔다.


마에다를 감시하던 병사가 상사에게 경례를 붙이며 보고했다.


“상사님! 사령부에서 보낸 마에다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취조실로 보내.”


상사가 명령을 내렸다. 체격이 크고 둥글둥글한 얼굴이었다. 큰 몸을 힘들게 움직이더니 취조실로 향했다.


취조실 문이 활짝 열렸다.


죄수복을 입은 마에다가 벽을 보고 서 있었다. 몸을 수색하던 병사들이 상사에게 경례를 붙였다.


상사가 마에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자가 마에다인가? 이름은?”


“저자의 이름은 마에다 쇼타입니다.”


병사의 답에 상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우연도 있나? 내 오랜 친구하고 이름이 똑같네!’


상사가 걸음을 옮겼다. 마에다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크게 소리쳤다.


“앗! 너는 마에다!”


상사가 다가오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에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상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 당신은 … 혹, 쿠시로 아키라!”


22년 전 관동군 이병이었던 마에다와 쿠시로가 다시 만났다. 그것도 취조실에서 ….


“마에다!”


“쿠시로!!”


그렇게 두 친구가 22여 년 만에 해후했다.


쿠시로가 병사들을 물렸다. 마에다와 함께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교수가 됐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어?


쿠시로가 눈물을 글썽이며 마에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하하하! … 이렇게 됐어. 넌 군에 계속 있었구나. 이젠 상사가 됐네. 옛날의 쿠시로가 아니네.”


마에다와 쿠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관동군 4중대에서 동고동락하며 서로를 챙겨주던 그 뜨거운 우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쿠시로가 말했다.


“일만 잘 처리하면 무죄 방면된다고 들었어. 다나카 총사령관님이 원하시는 걸 반드시 제대로 해야 해!”


“다나카라고? 나를 부른 사람이 다나카야? 혹, 우리 중대장이었던?”


쿠시로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마에다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벌써 헌병대 총사령관이 됐구나. 정말 대단하군. 헌병대에서 잘 나가는 건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는데, 실세 중의 실세인 헌병대 총사령관이 될 줄이야.

솔직히 무섭다. 그 무도한 자가 무슨 짓을 시킬지 … 제발 양심에 어긋나는 일만 아니라면 좋겠다. 하지만 그자가 그럴 리가 없잖아.”


마에다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깊은 한숨을 쉬었다.


쿠시로는 실망한 마에다를 보고 달래고 싶었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에다! 너 혹, 우리를 괴롭히던 나가시마 일병 얘기를 들었니?”


“아니 전혀? 그자가 어떻게 됐는데?”


“상병이 됐다고 아주 좋아했어. 고향에 내려가면 자기를 떠받들 거라고 방방 뛰었어.

그런데 행군 중에 총알이 날아왔어. 독립군이 쏜 총에 맞아서 죽었어. 살려달라고 애타게 울부짖었지만, 너무 중상이었어. 그렇게 끝났어.”


쿠시로가 과거를 회상했다.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참. 안됐구나. 허무하게 죽었구나.”


마에다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고참이었던 나가시마를 떠올렸다. 하극상을 저질렀다고 자기와 쿠시로를 처참하게 때렸던 자였다. 다나카와 다르지 않은 자였다.


마에다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비참하게 죽었단 말에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악인이라고 해도 비참한 죽음에 동정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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