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9편 <검은 판사, 악의 분노>
급하게 울리던 발소리가 멈췄다.
검은 판사 셋이 테라스 난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6층이었다. 무척 높은 곳이었다. 높은 곳이라 전망도 좋았다. 강남 번화가와 드넓은 한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저 멀리에 한강 다리가 보였다. 탐정단 밴이 건넜던 다리였다.
한강이 도도하게 흘러갔다. 잔잔한 물살이었지만, 그 흐름은 거침없었다.
다 다 딴 따 단 ~ 다 다 딴 따 단 ~
핏빛 장송곡이 계속 울려 퍼졌다. 복도 바닥에 MP3 플레이어가 떨어져 있었다.
“으으으!”
유강인이 몸을 일으켰다. 뒤따라 온 정찬우 형사가 서둘러 부축했다. 정형사가 말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응, 나는 괜찮아.”
유강인이 답을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정신 차리고 단원을 찾았다.
저 앞에 단원이 쓰러져 있었다.
유강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단원의 생사를 살폈다.
그때 단원이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죽지 않았다. 숨이 막혀 죽기 전 간신히 살아났다. 유강인 덕택이었다.
“휴우~!”
단원이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벽에 기대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다행이다.”
유강인이 참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테라스로 걸어갔다. 정찬우 형사가 그 뒤를 따랐다.
테라스에 검은 판사 셋이 서 있었다. 셋이 밖을 내다봤다. 역광이라 검은 실루엣만 보였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유강인과 정찬우 형사가 타오르는 긴장감에 침을 꿀컥 삼켰다.
잠시 시간이 지났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이었다. 침묵 속에 괴로움과 원망, 분노, 허탈감이 서려 있었다.
“이놈들!”
정형사가 침묵을 깼다. 분을 참을 수 없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품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검은 판사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다! 너희는 포위됐다. 어서 손을 들고 항복해!”
복도에서 천둥 같은 큰 소리가 들렸다.
검은 판사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큰 소리에 놀랄 법도 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테라스 난간 앞에 서서, 서울 시내만 잠자코 바라다볼 뿐이었다.
“구제 불능이군.!”
유강인도 분을 참지 못했다. 도저히 분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조수 둘이 6층으로 올라왔다.
“탐정님!”
“어? 저기에!”
조수 둘이 앞에 벌어진 사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검은 판사 셋이 테라스 난간 앞에 서 있었고 단원 하나는 벽에 기대고 주저앉았다. 유강인과 정찬우 형사는 검은 판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수지는 단원을 살펴!”
“알겠습니다, 선임 조수님.”
조수 둘이 흩어졌다.
황정수는 유강인을 향해 달려갔고 황수지는 죽다 살아난 단원을 살폈다. 그녀가 단원에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으으으~, 그, 그게 ….”
단원이 매우 놀란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목에 밧줄 자국이 선명했다.
유강인에게 달려온 황정수가 말했다.
“탐정님, 5층에 죽은 사람이 있었어요. 단원 하나가 죽었어요.”
“그렇군.”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검은 판사가 캐논 코드대로 사람을 죽였다.
캐논 코드 1, 5, 6!
김태리가 작곡한 살인 교향곡의 법칙이었다.
이 순서에 따라서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단원 하나를 죽였고 5층으로 올라가 또 한 명을 죽였다.
마지막은 6층이었다. 다행히 이를 간파한 유강인의 활약으로 단원 한 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층, 5층, 6층 살인은 조막손 김태리의 간곡한 부탁이었을 거 같았다.
자신의 작품을 강탈하고 자기 것인 양 발표한 J 앙상블을 캐논 코드 ‘1, 5, 6, 3, 4, 1, 2, 5’대로 죽이고 싶었던 거 같았다.
유강인이 걸음을 멈췄다. 검은 판사와 5m 거리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찬우 형사가 권총을 든 손을 내렸다. 검은 판사들은 이제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음악의 궁전 주차장에 서울청 기동대 버스와 강력반 밴 세 대가 도착했다.
버스에서 경찰 사십 명이 내렸고 밴에서 이호식 팀장을 비롯한 강력범죄수사대 형사 이십 명이 내렸다.
기동대 경찰들과 강력반 형사들이 관할 경찰서 경찰들과 함께 음악의 궁전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출동한 경찰차 경광등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사이렌 소리도 크게 들렸다.
검은 판사 셋이 기동대 버스를 내려다봤다. 그들이 누구라 할 거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셋이 일제히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다. 아주 천천히 ….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는군!”
유강인의 두 눈에 검은 판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었다. 셋 중 둘은 그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맨 왼쪽에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작은 키에 아담한 체격이었다. 얼굴은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바로 송상하 부회장의 비서, 나은성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여자였다.
나은성 옆에 남자가 서 있었다. 큰 키에 체격이 좋았다. 부리부리한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연순호였다. 부인과 갓 태어난 아들, 장인을 잃은 남자였다.
마지막 남자는 중간 키에 마른 체형이었다. 사진으로 본 얼굴이었다.
성형 수술 중 사망한 한종호의 형 한종수였다. 그는 동생을 잃은 형이었다.
얼굴에서 사진과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턱이었다. 각진 턱이 둥글게 부드러워졌다. 턱 성형의 결과였다.
“맞는군.”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이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검은 판사들의 정체를 드러났다.
검은 판사들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여유가 있었다. 마치 이때를 기다린 듯했다.
“어서 손들어!”
정찬우 형사가 크게 외쳤다. 총을 다시 들고 검은 판사들을 겨누었다.
검은 판사 셋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로 쳐다봤다. 그들이 대화를 나눴다.
“오늘 수고했어요.”
“네, 수고했습니다. 한 명을 못 죽였지만, 이는 하늘의 뜻입니다. 전생에 착한 사람이었나 봐요.”
“그렇겠지. 우리는 이제 내생을 기약합시다.”
“그래야죠. 그동안 잘 놀았습니다. 하하하!”
“원수를 갚았으니 다 끝난 겁니다. 우리 역할이 끝났으니. 이제 빚도 없습니다.”
“하하하!”
검은 판사 셋이 누구라 할 거 없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유강인이 불길함을 느꼈다. 그들의 모습은 삶을 포기한 자들이었다. 교차 살인을 완성하자, 이승을 떠나려는 거 같았다.
유강인이 급히 정찬우 형사에게 말했다.
“놈들이 뛰어내리기 전에 다리를 쏴! 자신 있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형사가 답을 하고 왼손으로 엄지척했다.
검은 판사들이 다시 몸을 돌렸다. 나은성이 크게 외쳤다. 나은성이 그들의 리더 같았다.
“우리 내생에 다시 만나요. 그때 우리 친구 해요!”
“좋습니다!”
검은 판사 셋이 말을 마치고 한쪽 다리를 높이 쳐들었다.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안돼!!”
유강인이 크게 외쳤다.
6층에서 떨어지면 바로 사망이었다. 음악의 궁전은 공연장이라 다른 건물과 그 규모를 비교할 수 없었다. 6층에서 떨어지면 10층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검은 판사들이 난간 위로 올라갔다.
정찬우 형사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가 방아쇠에 검지를 걸었다.
검은 판사들이 주저하지 않고
난간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을 때!
그 찰나의 순간 …
탕! 탕! 탕! 탕!!
첫발 공포탄과 함께 실탄 세 발이 연속적으로 발사됐다.
“악!”
“윽!”
비명이 연달아 들렸다. 검은 판사 셋이 다리에 총상을 입고 뒤로 넘어졌다. 그렇게 바닥에 쿵! 하며 떨어졌다.
건물 밖으로 떨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찬우 형사는 경찰청 최고의 무술 고수이자, 명사수였다. 마치 서부영화의 총잡이처럼 정확하게 다리를 겨냥해서 목표를 맞췄다.
“으으으~!”
검은 판사 셋이 한쪽 다리를 부여잡고 몸을 나뒹굴었다. 그들이 고통에 신음했다.
“휴우~!”
유강인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칫하면 검은 판사 셋이 자살로 생을 마감할 뻔했다.
그가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나 뒹구는 검은 판사들을 내려다봤다.
유강인이 크게 외쳤다.
“정형사, 어서 체포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수지는 119를 불러.”
“이놈, 유강인!”
연순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아파서 몸을 세우지 못했다. 대신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유강인의 멱살을 꽉 잡고 싶은 거 같았다.
유강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순호, 치료받고 조사를 기다려라. 당신들은 모두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 누가 당신들을 조종했는지 조사를 통해 밝히겠다.”
유강인의 말에 검은 판사들이 냉소를 보냈다.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유탐정!”
그때 유강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호식 팀장이 헐레벌떡 복도를 달렸다. 그가 유강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잡은 거야? 검은 판사를 잡은 거야?”
이팀장의 말에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답했다.
“팀장님, 잡았습니다. 검은 판사인 나은성, 연순호, 한종수를 모두 잡았습니다.
셋이 테라스 난간에서 뛰어내리려 해 총을 쏴서 이를 막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모두 다리에 총을 맞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아! 그래, 다행이네.”
“다행은 아닙니다. 놈들이 J 앙상블 단원 둘을 죽였습니다. 한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객원 연주자 둘도 다쳤습니다.”
“객원 연주자들은 병원에 실려 갔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들었어.”
“그건 잘됐네요. 어서 내려가죠.”
유강인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듯 급히 이호식 팀장에게 말했다.
“우선배님은 어떻게 됐죠? 김태리를 찾아갔나요?”
“김태리 주소를 확인하고 집으로 갔어. 경찰청에서 멀지 않아서 도착했을 거야. 주소지에 산다며 만날 수 있어.”
“그렇군요.”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게 서울 반포구 음악의 궁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청 강력범죄수사대와 관할 경찰서가 사건 수습에 한창일 때
우동식 형사가 차에서 내렸다. 동료 형사 둘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오래된 아파트 단지였다. 15층 높이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우형사가 한 아파트 동에서 걸음을 멈췄다. 동료와 함께 공동 출입구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1층, 2층, 3층!
엘리베이터가 3층에 다다르자, 문이 열렸다. 우동식 형사와 동료 둘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들이 301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우형사가 인터폰에 있는 종을 눌렀다.
딩동댕!
벨소리가 들리자,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우형사가 말했다. 굳은 목소리였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에서 나왔습니다. 김태리씨가 집에 사나요?”
“네에? 누구라고요?”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입니다. 김태리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인터폰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동식 형사가 다시 한번 벨을 눌렀다.
딩동댕!
우형사가 이를 악물었다. 문을 열지 않는다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현관문 앞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여자의 외모는 초췌했다.
긴 생머리가 얼굴을 가렸다. 작은 몸에 작은 키였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입었다. 오래된 옷이라 낡았고 색이 누리끼리했다.
손에는 하얀색 털장갑을 끼고 있었다. 네 손가락이 붙어있는 벙어리장갑이었다.
우형사가 앞에 있는 여자를 보고 말했다.
“김태리씨죠?”
여자가 고개를 끄떡이고 답했다.
“맞아요. 제가 김태리예요.”
“실례지만, 혹 별명이 조막손인가요?”
김태리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가 장갑을 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하얀색 벙어리장갑이 조명을 받아서 환하게 빛났다.
그녀가 장갑을 벗으려 하자, 우동식 형사가 한 손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장갑을 벗을 필요 없습니다.”
김태리가 그 말을 듣고 두 손을 내렸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들은 잘 있나요?”
“친구라고요?”
“J 앙상블 친구들이요. 캐논 변주곡으로 유명한 ….”
우형사 그 말을 듣고 북극 빙하 같은 차가움을 느꼈다. 얼굴이 빙하처럼 굳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김태리가 방긋 웃었다. 긴 생머리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