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9편 <검은 판사, 악의 분노>
유강인이 그 말을 듣고 송상하 부회장을 떠올렸다.
송부회장은 재벌 3세로 난봉꾼이었다. 아울러 악질적인 사업가였다. 그는 그룹 후계자가 되기 위해 이복동생과 아버지까지 죽이려 했다.
말 그대로 인과응보였다.
송상하 부회장은 그동안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 악행이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돌아왔다.
유강인이 셋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조사는 해야 했다. 그게 탐정의 일이었다. 그가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들의 범죄는 이 자리에서 따지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입니다.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당신들은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다 억울한 일을 당했고 그 한을 풀기 위해 검은 판사가 됐습니다.
당신들한테 조력자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사실대로 말하세요.”
셋이 너나 할 거 없이 두 눈을 꼭 감았다. 말할 게 없다는 뜻이었다.
유강인이 이에 개의치 않고 질문을 계속 던졌다.
“30년 전 연쇄살인마, 면도날 송창수를 아나요?”
“…….”
“당신들은 송창수처럼 밧줄을 사용해 사람을 죽였습니다. 30년 전 범행 수법이 고스란히 재현됐습니다. 시신 목덜미에 커다란 매듭 자국 두 개가 있었습니다.
어서 답하세요. 송창수와 그의 공범인 선생을 만났나요?”
“…….”
여전히 검은 판사들이 답을 하지 않았다.
유강인이 답답함을 느꼈다. 두꺼운 벽과 말하는 느낌이었다. 그가 잠시 검은 판사들을 노려봤다.
다른 건 몰라도 진실을 숨기려는 자세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화를 꾹 참고 질문을 이었다.
“붉은 원이라는 유령 의사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 중 살모사가 킬러로 변모했습니다. 살모사한테 교육을 받았나요? 살모사 부하 중 이동호를 아나요?”
“…….”
여전히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유강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검은 판사들이 커다란 성문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앞에 있는 물잔을 들고 물을 쭉 들이켰다.
유강인이 물을 말끔히 다 마시고 셋 중 연순호의 눈매를 유심히 살폈다. 유강인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뭔가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찬우 형사에게 말했다.
“정형사, 연순호씨 등판을 확인해야겠어. 눈매를 보니 정금학씨 집에서 본 검은 판사 같아. 등에 칼에 맞은 자국이 있나 살펴봐. 조사실 밖으로 나가서 확인해.”
“칼자국이요?”
“응, 정금학씨 집에 둘이 들이닥쳤어. 이동호와 검은 판사였어. 둘이 정금학씨를 죽이려 했어.
그때 내가 초인종을 눌렀어. 그 초인종 소리 때문에 정금학씨가 간신히 살았어. 이후 검은 판사와 격투를 벌였는데 그만 칼에 맞고 말았어.
내가 쓰러지자, 정금학씨가 검은 판사의 등판을 메스로 찔렀어. 우측 어깨뼈 아래에 상처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정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연순호 뒤로 갔다. 그러자 연순호가 옆에 앉은 나은성에게 말했다.
“실례할게요. 은성씨.”
“괜찮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나은성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연순호가 씩 웃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손을 가슴팍으로 올리더니 셔츠를 거칠게 벗어 버렸다.
그러자 상체가 드러났다. 근육질의 당당한 체격이었다.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밖으로 나갈 필요 없이 여기서 보세요.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음!”
유강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매우 거친 행동이었다. 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연순호의 등판을 살폈다.
우측 어깨뼈 아래에 칼에 맞은 상처가 있었다. 정금학의 말 그대로였다.
이동호와 함께 정금학을 죽이려고 한 검은 판사는 연순호였다. 어깨뼈 아래 상처가 이를 증명했다.
연순호는 유강인에게 칼을 휘둘러 큰 상처를 입힌 자이기도 했다.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용서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시 정금학이 없었다면 유강인은 과다 출혈도 죽을 뻔했다.
긴장감이 다시 고조됐다.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며 살상을 일삼은 검은 판사와 이를 막으려는 탐정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똑! 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출입문이 천천히 열렸다. 우동식 형사가 한 여자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김태리였다.
김태리가 동료들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나은성, 연순호, 한종수도 마찬가지였다. 셋도 환하게 웃었다. 마치 전장의 전우를 보는 듯했다. 삶과 죽음을 같이 하는 거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유강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검은 판사들이 똘똘 뭉쳤다. 그들은 하나였다.
“유탐정님!”
우동식 형사가 유강인에게 손짓했다. 긴히 할 말이 있는 거 같았다. 우형사가 조사실에서 나갔다.
유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출입문으로 향하다가 고개를 돌려 김태리를 바라봤다.
김태리는 음악의 궁전에서 캐논 코드를 이용한 살인 교향곡을 연주한 자였다.
그녀의 외모는 볼품이 없었다. 긴 생머리가 얼굴을 가렸다. 오래된 하얀색 파카와 누리끼리한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하얀색 벙어리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유강인이 정찬우 형사에게 말했다.
“넷을 조사하고 있어. 난 우선배님과 얘기하고 올 테니.”
“알겠습니다.”
유강인이 조사실에서 나갔다. 조사실 문이 잠기자, 우동식 형사가 급히 입을 열었다.
“대장, 판사 조사 결과가 나왔어.”
“그래요? 어떻게 됐죠?”
유강인이 급히 물었다.
우동식 형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2심 판사 중에서 한 명이 의심스러워. 외동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도영우 판사야. 부장 판사까지 지냈어. 지금은 변호사야.”
“도영우 판사!”
“그 사람은 현재 강원도 영일시에 살고 있어. 영일시는 송상하 부회장과 최인식 교수가 죽은 나진시에서 멀지 않아. 바로 인접한 도시야.”
“그렇군요. 그렇다면 도영우 판사가 의심스럽습니다. 그자를 만나야 합니다. 첫 번째 검은 판사일 가능성이 큽니다.”
“김형사가 연락했는데 전화를 받았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했어.”
“그래요? … 아주 자신만만하군요. 지금 당장 강원도 영일시로 가겠습니다.”
“지금 가겠다고?”
“오늘 밤은 강원도 영일시 호텔에서 묵고 아침에 도판사를 만나겠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잡아주세요.”
“알았어.”
“정형사한테 말하세요. 검은 판사 조사가 끝나면 바로 저를 따라오라고.”
“응, 그리하지.”
유강인이 걸음을 옮겼다.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첫 번째 검은 판사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는 도영우 전직 판사였다. 현직 변호사였다. 딸을 잃은 아버지였다.
한편 조사실에서는 반가움이 넘쳤다. 나은성이 김태리에게 말했다.
“언니!”
“응.”
김태리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정찬우 형사가 한 번 헛기침했다. 그가 말했다.
“김태리씨 자리에 앉으세요.”
김태리가 자리에 앉아, 조사가 이어졌다.
정형사가 김태리에게 말했다.
“김태리씨,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잘 아시죠?”
“…….”
김태리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정찬우 형사가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검은 판사 넷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잡히면 입을 꾹 다물기로 약속한 거 같았다.
정형사가 답답함을 참고 질문을 이었다.
“당신들을 교육하고 범행을 계획한 자가 누구죠? 그 사람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자가 누구인지 말해주세요.
어차피 유강인 탐정님이 진상을 다 밝힐 겁니다. 입을 다물고 딴청을 부린 들 소용 없습니다. 죄만 가중될 뿐입니다.”
그러자 검은 판사 넷이 보란 듯이 딴청을 부렸다. 천장을 보거나 바닥만 살폈다.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정찬우 형사가 화를 참고 질문을 이었다.
“당신들 모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원한을 갚으려고 검은 판사 조직에 가입했습니다.
그 조직을 누가 만들었는지 말해주세요. 그래야 정상참작될 수 있습니다.”
“…….”
검은 판사 넷이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정찬우 형사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출입문 근처에 서 있던 우동식 형사가 정형사에게 급히 말했다.
“정형사! 조사가 끝났어?”
정찬우 형사가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조사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모두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조사를 이만 마치고 대장을 따라가.”
“네? … 선배님이 어디 가셨나요?”
“응. 강원도 영일시로 떠났어. 거기에 첫 번째 검은 판사로 유력한 도영우 변호사가 살고 있어.”
“아, 첫 번째 검은 판사를 찾았군요.”
“응, 찾았어. 지금은 전직 판사야.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 어서 영일시로 떠나. 대장이 정형사도 영일시로 오라고 했어.”
“알겠습니다. 그러면 검은 판사 넷은 선배님께 맡기겠습니다.”
“OK! 걱정하지 마.”
정찬우 형사가 서둘렀다. 그가 사무실에서 황급히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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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인 차 안에서 서류를 살폈다. 서류는 30년 전 면도날 연쇄살인마 송창수 사건 파일이었다. 과거 기록을 통해 선생을 찾아야 했다.
송창수가 말했다. 선생은 가까이에 있다고!
그는 30년 전 참고인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러 고인이 된 사람이 많았다.
참고인 열 명 중, 다섯은 고인이었다. 나머지 사람도 나이가 많았다.
참고인들은 송창수가 살았던 집주인, 이웃 주민, 고등학교 친구, 문구점 사장이었다.
유강인이 참고인 신상명세서를 살피다 움찔했다. 그가 한 사람에 집중했다.
뭔가가 심상치 않은 거 같았다.
현재 생존자는 이웃 주민 두 명, 친구 두 명, 문구점 사장 한 명이었다.
그중에서 유강인이 집중한 사람은 문구점 사장이었다. 문구점은 송창수가 살았던 진양구에 있었다.
진양구는 범죄가 일어났던 광동구와 가까웠다. 인접한 구였다.
생존자 중 이웃 주민은 나이가 무척 많았다. 현재 90세와 93세였다. 검은 판사를 구상하고 진두지휘하기에는 지나치게 고령이었다.
친구 둘은 현재 62살이었다. 참고인 조사 기록을 살핀 결과, 그들은 머리가 좋은 거 같지 않았다.
질문에 짧게 대답했고 사용한 언어도 무척 단순했다. 뛰어난 범죄 기획자인 선생이 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들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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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수를 최근에 만났나요?”
“아니요.”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나요?”
“그게, 잘 … 한 달 전인가?”
“송창수가 혹 범죄에 대해 말한 적이 있나요?”
“몰라요. 만나며 술만 빨았어요.”
“송창수한테 다른 친구는 있나요?”
“우리 모두 외톨이였어요. 외톨이끼리 만났어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하시는 일이 뭐죠?”
“공장에서 자재를 날라요. 맨날 그것만 해요.”
“송창수가 특별히 좋아하는 게 있었나요?”
“창수는 그냥 집에서 뒹굴었어요. 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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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친구 둘은 송창수보다훨씬 단순한 인간 같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문구점 사장, 금대석이었다. 현재 68세였다.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송창수한테 면도날을 판 사람이었다.
유강인이 ‘면도날’에 집중했다.
‘면도날?’
잠시 후
유강인이 아! 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급히 생각했다.
‘그렇지! 면도날! 송창수의 트레이드마크는 밧줄이 아니야. 면도날이야. 그래서 그의 별명이 면도날인 거야. 면도날이 밧줄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겼어.
살인 도구인 밧줄은 현장에 없었지만, 시신을 훼손한 면도날은 현장에 수북하게 떨어져 있었어.
그래! 면도날이야. 면도날이 중요해. 따라서 면도날을 판 사람도 역시 중요해!’
유강인이 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황정수와 황수지가 미소를 지었다. 유강인이 뭔가를 알아냈다는 걸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