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8편 <검은 자서전과 악의 비밀>
다음날
2025년 11월 15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미라클 북스 사옥 회의장에서 회의가 한창이었다.
고두희 대표이사가 입을 열었다. 40대 여성이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세련된 외모였다. 까만 단발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이제 1권 준비가 다 끝났죠?”
회의에 참석한 대필작가 삼인 중 1권을 맡은 남태호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
“네, 다 끝났습니다. 기존 자서전에다 일부 내용을 추가하는 정도라 일이 빨리 끝났습니다. 교정 교열도 오늘 중에 다 끝날 겁니다.”
“그럼, 고혜정 팀장, 출간 기념회 일정을 잡으세요.”
고혜정 팀장이 고개를 끄떡이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1권 가제본을 백두성 회장님께 보내고 출간 기념회 일정을 잡겠습니다.”
“최대한 성대하게 해야 합니다. 백회장님이 모든 비용을 감당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행사를 최고급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 … 아! 죄송합니다. 대표이사님.”
고대표가 씩 웃었다. 그녀가 동생을 타이르며 말했다.
“공사는 가려야 합니다. 여기는 회사입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대표이사님,”
고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한편 서울 강남구 JS 그룹 본사에서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JS 그룹의 새로운 도약과 출발을 약속하는 행사였다. 행사 이름은 ‘NEW & FRESH’ 였다.
무척 성대한 행사였다.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 대강당에서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룹 임직원과 계열사 임직원, 외부 귀빈들이 참석해 행사를 빛냈다.
오늘 행사의 주인공은 부회장 송상하였다. 송상하는 회장 송해성의 큰아들로 10년 전부터 부회장직을 맡아왔다.
송부회장은 50대 중반이었다. 나이로만 따지면 CEO로서 적당했다. 연륜이 쌓였고 경험도 풍부했다.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JS 그룹의 자동차를 홍보했다. JS 모터의 심장이라고 불리며 열정적으로 세일즈에 임했다.
송상하 부회장은 타고난 경영인이자, 탁월한 세일즈맨으로 세간에 잘 알려졌다. 그래서 그가 차기 회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본 행사에 앞서 아름다운 클래식 연주가 시작됐다. 현악 5중주가 아름다운 음악을 뽐냈다.
그중에서 파헬벨의 캐논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참 아름답고 가슴 설레는 음악이었다.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첼로의 육중한 음악이 울려 퍼질 때 드디어 행사 시작을 알렸다.
JS 그룹 홍보 2팀장이 사회를 맡았다. 앞에 있는 단으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환영합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JS 그룹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항상 새롭고 항상 신선함을 모토로 하는 행사입니다. NEW & FRESH 행사를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와아!”
환호성이 터지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던 행사가 드디어 시작했다.
행사 시작을 알리자, 단 뒤에 있는 벽에서 하얀 스크린이 내려왔다. 영화관 규모의 대형 스크린이었다.
축하 영상 시간이었다. 불이 꺼지자, 영상이 시작되었다. 60년간 끊임없이 계속된 JS 그룹의 금자탑이 스크린을 수 놓았다.
초대 회장인 송철기 회장이 피땀 흘리며 자전거를 만들고 그 자전거를 타고 동해안을 달리는 장면을 시작으로 트럭, 세단, 스포츠카 등 전 세계를 누비는 JS 그룹의 명차들이 소개됐다.
뒤이어 계열사들도 소개됐다. 건설, 화학, 엔터 등이 소개된 후 유명 연예인들이 축하 인사를 남겼다.
“배우 송철기입니다. JS 그룹의 NEW & FRESH 행사를 응원합니다.”
“방송인 유민호입니다. 최고의 세일즈맨 JS 그룹의 송상하 부회장님을 사랑합니다.”
“가수 김미아입니다. JS 그룹이 오늘 새로운 도약을 해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기를 고대합니다.”
10여 명의 찬사가 뒤따랐다.
손님들이 너도나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스크린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친숙했다. 사생활이 깨끗해서 평판이 좋은 유명인들이었다.
다음 순서는 라이징 스타, 여배우 장수진의 축하 인사였다. 스크린이 위로 올라가고 불이 켜졌다.
장수진은 다른 연예인과 달리 직접 행사에 참여했다. 그녀는 JS 모토의 전속 모델이었다. 자동차 CF에서 JS 모터 차를 타고 그 뛰어난 성능과 편안함을 홍보했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
“장수진 배우님, 어서 나오세요.”
사회자의 말에 장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20대 중반 여성이었다.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단 위로 올라갔다. 무척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양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검은색 드레스를 차려입었고 발목까지 치마가 내려왔다. 하이힐은 빨간색이었다. 그래서 검은색과 빨간색이 묘하게 대조를 이루며 이목을 끌었다.
커다란 물결처럼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조명을 받자, 그 윤기가 반짝거렸다.
얼굴은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갸름한 얼굴, 커다란 눈망울,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은 매혹적이었다. 중간 키에 마른 몸이었다.
장수진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JS 모터의 전속 모델로 항상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훌륭한 차를 만들기 위해 항상 고생하시는 연구진, 제작진 그리고 경영진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
오늘을 계기로 JS 그룹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기업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JS 그룹의 심장, 송상하 부회장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장수진이 말을 마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시 커다란 박수 소리가 들렸다. 훌륭한 축하사였다.
다음 순서로 바로 이어졌다. 정부와 재계 인사의 축하사였다.
행사가 참 화려하고 훌륭했다. 거액을 들여서 준비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JS 그룹에서 NEW & FRESH 행사가 한 창일 때
차 세 대가 강남 사거리에 있었다. 탐정단 밴과 서해안 경찰서, 서울청 차였다.
차 안에 유강인이 있었다.
유강인이 말없이 저 멀리 보이는 JS 그룹 사옥을 노려봤다. 그러다 양 입술에 침을 묻혔다. 좀 긴장한 거 같았다. 그는 오늘 큰일을 벌여야 했다. 일종의 쇼와 같았다.
*
“다음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송상하 부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제가 항상 존경하고 따르는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부탁합니다.”
사회자가 뻔한 아부와 함께 부회장을 호명하자, 대강당이 떠나갈 거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행사에 참여한 손님들이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의 주인공을 환영했다. 마치 곧 황위에 오를 황태자 환영 행사 같았다.
황위를 이을 황태자가 어서 나타나기만을 사람들이 고대했다.
잠시 후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젊은 여비서가 나타났다. 그녀도 검은 정장을 입었다.
행사장을 쭉 살피던 여비서가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불을 끄세요.”
“알겠습니다.”
여비서의 지시가 떨어지자, 대강당의 불이 모두 꺼졌다.
순식간에 암흑천지가 되었다.
10초의 시간이 흐른 후
현악 5중주가 연주를 시작했다. 요한 스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했다. 무척 경쾌하고 신이 나는 곡이었다.
요한 스트라우스 1세는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였다. 아들인 요한 스트라우스 2세는 왈츠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아버지인 요한 스트라우스 1세는 그 명성이 아들에 미치지 못했다. 지금 연주되는 라데츠키 행진곡은 그의 대표곡이었다.
라데츠키 행진곡이 끝나자,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대표곡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선율이 행사장을 부드럽게 감쌌다.
바이올린이 높은 음, 첼로가 남은 음, 비올라가 중간 음을 책임지며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사람들이 음악에 취한 듯 입을 벌렸다. 당장 단 위로 올라가 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다.
요한 스트라우스 1세의 곡은 현 회장인 송해성 회장을 상징했다.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곡은 차기 회장인 될 송상하 부회장을 상징했다.
두 음악이 차례대로 연주되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음악에서 암시하는 게 있었다.
송회장의 시대가 이제 막을 내리고 송부회장의 시대가 올 거라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끝을 맺었을 때 갑자기 단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등장했다. 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극적인 등장이었다.
그는 50대 중반 남자였다. 키가 크고 살이 많이 졌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자신 있는 걸음이었다. 그렇게 단으로 향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송상하 부회장이었다.
송부회장은 하얀 피부였다. 하얀 피부가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백옥처럼 빛났다. 풍채가 좋아서 회장 자리에 참 잘 어울렸다.
살이 찐 얼굴 위로 금테 안경이 번쩍였다. 안경을 써서 그런지 매우 지적으로 보였다. 눈, 코, 입은 작은 편이었고 이마는 넓었다.
송부회장이 단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사회자가 그에게 예를 갖췄다.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고 마이크를 건넸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송상하 부회장이 씽끗 웃었다. 그때 불이 켜졌다. 다시 환해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JS 그룹 송상하 부회장입니다. 여러분들을 만나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송부회장이 말을 마치고 고개 숙여 손님들에게 인사했다.
“와아!”
“사랑합니다. 부회장님!”
다시 환호성이 크게 들렸다. 사람들이 부회장을 열렬히 환영했다.
1분 동안 박수 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과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송상하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먼저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 귀빈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아버지이신 회장님이 참석해야 했지만, 몸이 편찮으셔서 제가 대신 참석했습니다. 이에 송구할 따름입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송부회장이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정말 뜻깊은 자리입니다. 우리 JS 그룹이 새로운 도약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NEW & FRESH를 모토로 삼아 항상 새롭게 항상 신선한 모습으로 고객들을 대하겠습니다. 그래서 내년 2026년에는 올해보다 훨씬 성장한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전년 대비 매출을 150퍼센트 이상 달성하고 전년 대비 순이익을 100퍼센트 이상 달성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송부회장이 많은 사람 앞에서 포부를 밝혔다. 내년을 기점으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실현이 힘들어 보이는 거창한 약속이었지만, 듣기에 참 좋았다.
사람들이 송상하 부회장의 말에 취한 듯, 정신없이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을 때
대강당 뒤쪽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한 사람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유강인이었다. 뒤이어 백정현 형사와 정찬우 형사도 들어왔다.
갑자기 외부인이 등장하자, 문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유강인을 제지했다. 그러자 형사들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수사 중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여기는 행사 중입니다. 행사가 끝난 다음에 오시죠.”
“유강인 탐정님께서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 그래요? 그래도 ….”
경호원들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송상하 부회장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를 경청하는 중이었다.
유강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행사장에 찬물을 붓는 것과 같았다.
경호원들은 유강인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들도 소식을 익히 알고 있었다. 경호 2팀이 박재영 납치, 구타, 살인 미수로 체포되었고 수사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
남은 경호원들이 몸을 떨었다. 자기들도 경찰에 불려갈 거 같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경호원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유강인이 걸음을 옮겼다. 앞에 있는 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송상하 부회장은 청중들을 향해 열변을 계속 토했다. 그는 김돈국 비서한테 들은 말이 있었다. 박재영이 곧 죽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속이 후련해서인지 여유가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