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20편 <검은 피, 저주의 서릿발>
지단길 박사가 연구원 소개를 이었다. 그가 맞은편을 가리키고 말했다.
“이분은 임상실험 담당 최슬기 연구원님입니다.”
유강인이 고개를 돌렸다.
최슬기 연구원은 30대 여자였다. 평범한 외모였다. 단발머리에 얼굴이 동그랬다.
최연구원이 유강인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유강인 탐정님. 저는 최슬기 연구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강인이 맞절하고 최슬기 연구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병아리 1은 여자였다. 유강인과 또래거나 나이가 어릴 거 같았다. 최연구원은 성별과 나이가 딱 맞았다. 병아리 1일 가능성이 있었다.
유강인이 잠시 생각했다.
‘병아리 1은 지단길 박사 최측근 동생들 같았는데 … 최연구원도 가능성이 있어. 동생들과 비슷한 연배고 여자야. 지박사의 최측근일 수 있어. 그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무시할 순 없어.’
유강인이 왼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병아리 1로 의심되는 사람이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지정혜, 지수미, 최슬기였다.
지단길 박사가 환하게 웃으며 마지막 연구원을 소개했다.
“최슬기 연구원님 옆에 계신 분은, 제가 무척 존경하는 분입니다.
미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시고 한국으로 오신 권재훈 박사님입니다. 바이오클린 연구 자문위원이십니다.
그동안 권박사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소개를 받은 권재훈 박사가 씩 웃었다.
그는 40대 남자로 키가 크고 말랐다. 배기원 조수보다 더 뛰어난 외모였다. 이목구비가 무척 조화로웠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매력적이었고 날렵한 턱선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권재훈이라고 합니다. 유강인 탐정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재훈 박사님.”
유강인이 권박사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생각했다.
‘권재훈 박사도 나이와 성별로 볼 때 배후 조종자 병아리 2일 수 있어.’
지단길 박사가 말을 이었다.
“권박사님 옆에 계신 분은 저를 보좌하는 비서님입니다.”
비서가 유강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비서 고창석입니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탐정 유강인입니다.”
유강인이 맞절했다.
그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병아리 2는 바이오클린 연구원 중 하나야. 여기 연구원 중 내 또래 남자는 둘이야. 배기원 조수와 권재훈 박사야. 그렇다면 병아리 2는 둘 중의 한 명이야.’
유강인이 생각을 마치고 배기원 조수와 권재훈 박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둘 다 대단한 연구원이었다.
배조수는 바이오클린 연구의 중심에 있었다. 연구 책임자 박순후 박사의 조수였다.
권박사는 미국에서 인정받은 유명 과학자였다. 바이오클린 연구 자문위원이었다.
둘 다 바이오클린 연구에 깊숙이 개입했다. 연구 책임자 박순후 박사를 오른팔 왼팔처럼 보좌했다.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예상대로 병아리 1과 2가 파티에 참석했다면, 범인의 범위가 확 좁혀졌다.
병아리 2는 배기원 조수와 권재훈 박사 둘 중에서 한 명이고 병아리 1은 수석 연구원 지정혜, 홍보팀장 지수미, 연구원 최슬기 셋 중에서 한 명이었다.
범인은 이 중에 있었다.
“자, 술과 안주가 나왔습니다.”
남자 목소리와 함께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요리사가 간이 테이블을 밀었다.
고창석 비서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리사가 유강인 앞에 간이 테이블을 멈췄다.
유강인이 요리사에게 말했다.
“요리사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탐정 유강인입니다.”
요리사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는 요리사 고영수입니다. 좋은 안주를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세요.”
“네, 잘 먹겠습니다.”
유강인이 둘을 보고 생각했다.
‘저 둘이 바로 집사 고두영의 자식들이군. 비서와 요리사야.’
형, 고창석 비서는 50대 남자로 키가 컸다. 매우 마른 체격이라 갈치 같았다. 허연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았다. 눈썹은 없는 거처럼 희미했다.
동생, 고영수 요리사는 40대 남자로 중간 키였다. 통통한 몸이었다. 형과 달리 이목구비가 선명했다. 눈썹이 진하고 두꺼웠다. 코가 커서 서양인 같았다.
형제의 외모가 자못 달랐다. 외모로 볼 때 형제 같지 않았다.
유강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집사 고두영의 자식 둘이 여기에 있어. 이게 심상치 않아. 둘 다 병아리 2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신가? 아니면 형제 하나만 꼭두각신가?’
유강인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서와 요리사의 등장으로 잡아야 할 적이 늘어난 것만 같았다.
지단길 박사가 술잔을 들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 남매는 몸이 아파서 술 대신 포도 주스를 마시겠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괜찮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괜찮다고 말했다.
지단길 박사가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힘을 주고 외쳤다.
“오늘은 아주 기쁜 날입니다. 바이오클린의 대성공 축하합니다! 건배!”
“건배!”
“브라보!”
모인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술 쭉 마셨다.
유강인도 술을 마셨다. 조수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대신 매의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만약의 경우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10분이 지났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연구소 주인인 지단길 박사와 동생들이 아팠지만, 파티 분위기는 신이 났다. 바이오클린 대성공이 그 아픔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눴다.
유강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지단길 박사에게 말했다.
“지박사님,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지단길 박사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오늘은 아주 기쁜 날인데 뭘 꺼리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유강인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어서 말씀하세요. 무례한 질문도 괜찮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 하하하!”
지단길 박사가 말을 마치고 크게 웃었다.
유강인이 정색하고 말했다.
“부친이신 지남철 박사님께서 … 무속에 심취하셨나요?”
“네에?”
얼음송곳 같은 질문이었다.
지단길 박사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연구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팍 가라앉았다.
유강인이 그 분위기를 느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감추고 싶은 걸 들킨 것만 같았다.
‘그렇군.’
유강인이 잘 됐다는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바이오클린의 기원은 알고 싶습니다. 무속의 약이 그 기원 같은데, 아닌가요?
청천이라고 불리는 사이비 종교를 수사한 결과, 이에 해당하는 정황 증거가 나왔습니다.”
“으으으~!”
지단길 박사가 대답 대신 신음을 내뱉었다.
잠시 침묵이 흘러내렸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동생들이 안절부절못했다.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쿨럭! 쿨럭!”
지단길 박사가 기침을 자지러지게 했다.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강인 탐정님, 근거가 있는 말인가요? 아니면 넘겨짚는 건가요?”
유강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근거가 있습니다.”
“그 근거가 뭐죠?”
“근거는 용궁 보살의 검붉은 액체! 혈귀비법으로 만든 약입니다. 그 책자를 입수했습니다.”
“용궁 보살, 혈귀비법이라고요?”
순간! 지단길 박사의 두 눈이 500원 동전처럼 커졌다. 그가 당황한 듯 멈칫거렸다. 그러다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는 병자였지만, 웃음소리가 컸다.
웃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동생들과 연구원들은 웃지 않았다.
5초 후 지단길 박사가 웃음을 뚝 멈추고 입을 열었다.
“역시! 유강인 탐정님입니다. 귀신은 속여도 유강인 탐정님은 못 속인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허언이 아니군요.”
“그럼,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까?”
유강인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단길 박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답했다.
“바이오클린 연구는 국가 1급 기밀 사안입니다. 연구와 관련된 핵심 사안은 외부인에게 발설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사실 확인은 어렵겠군요.”
“그렇지만, … 유탐정님을 초대했으니 한가지는 말하겠습니다.”
지단길 박사가 말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딘가 아픈 거 같았다.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고통을 참고 말을 이었다.
“오래전 아버지 서재에서 책 한 권을 봤습니다.”
“아버지라면 지남철 박사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 책은 아버지가 매우 아끼던 책이었습니다. 책 제목은 종교에서 철학으로입니다. 영국 학자 프랜시스 맥도널드 콘퍼드가 지은 책입니다.”
“그렇군요.”
“아버지께 그 책을 왜 이리 아끼냐고 물었습니다. … 아버지가 웃으면서 답하셨습니다.
태초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초자연적 힘, 애니미즘, 토테미즘이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샤머니즘으로 발전했고 그러다 체계적인 종교가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샤머니즘이라는 말에 유강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샤먼은 무당이었다. 샤머니즘은 무속이었다.
지단길 박사가 힘들게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저자인 콘퍼드에 따르면 원시 신앙의 전통이 철학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 이성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철학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인간의 원시적 염원을 이성적으로 체계화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성립한 철학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과학 철학을 낳았고 현대의 과학은 그 과학 철학을 통해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이 추론에 따르면 샤머니즘이 바로 과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 강의와 같은 시간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강인이 아! 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천재 과학자가 무당과 손잡은 이유를 알 거 같았다.
그 답은 ‘종교에서 철학으로’라는 책 속에 있었다.
지남철 박사가 그 책을 탐독하고 무릎을 탁! 쳤을 거 같았다. 지체하지 않고 용궁 보살을 찾았을 거 같았다.
무속의 약이 일시적이었지만, 효험이 있었다. 막냇동생이 그 약을 먹고 몇 달 동안은 멀쩡했었다.
유강인이 생각했다.
‘그렇구나. 당대의 천재가 무당과 손을 잡은 건 다 이유가 있었어. 책 한 권이 큰 역할을 한 거야.
무속은 아주 오랜 시간, 수많은 대를 이어서 전수됐어. 무속의 핵심은 무당이야.
무당은 길흉화복을 점치고 악재와 고통을 없애는 역할이야. 그 과정에서 약도 만들었을 거야. 그 약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했을 거야.’
유강인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이었다.
‘무당 중 무자비한 자들이 있었어. 그들은 피에 굶주린 혈귀를 모시는 혈마 무당이었어.
혈마 무당들이 혈귀비법을 완성된 거야. 혈귀비법의 약은 일시적이나마 유전병에 효험이 있었어.
천재였던 지남철 박사가 종교에서 철학으로라는 책을 읽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야.
혈마 용궁 보살이 만든 약의 가능성을 본 거야.’
지단길 박사가 씩 웃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다는 표정이었다.
지박사가 돌려서 말했지만, 최첨단 과학의 산물인 바이오클린이 무속의 약에서 기원했다는 걸 사실상 인정했다.
유강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바이오클린의 연구 목표는 바로 이거 군요. 제 생각을 한번 말해봐도 되나요?”
“네, 말해보세요. 무엇이든 간에 ….”
지단길 박사가 궁금한 얼굴로 답했다.
유강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궁 보살이 만든 약은, 분명 약효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능이 떨어졌습니다.
약을 계속 투약할수록 그 효능이 점점 떨어져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에 약의 효능을 체내에서 계속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바이오클린 연구의 시작이었습니다.”
지단길 박사와 동생들, 연구원들이 그 말을 듣고 놀란 듯 움찔했다.
유강인이 말을 이었다.
“지남철 박사는 최첨단 과학으로 이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지박사의 연구 계획에 따라서 수십 년간 연구가 진행됐고 결국, 세포 분열과 성장의 설계도라 할 수 있는 유전자를 변형하는 약을 만들었습니다.
… 그 약이 바로 기적의 약, 바이오클린 아닙니까? 바이오클린은 혈귀비법을 체내에서 영구적으로 유지하는 약이 아닌가요?”
“헉!”
“세상에!”
귀빈실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지단길 박사와 동생들, 연구원들이 모두 화들짝 놀랐다. 그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강인이 말했다.
“바이오클린이 유전자 변형 치료제라는 말을 듣고 검색을 좀 했습니다.”
지단길의 박사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커다란 비밀을 들킨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