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다들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힘든 법이라죠,
폭풍처럼 일들이 계속해서 휘몰아쳤던 9월 개강 이후 여러 날들이 지났고 그동안 내가 맡은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 대학교 내 학생상담센터에서는 개인상담이나 심리검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사업들을 진행한다. 집단상담 참가자 모집을 하더라도 학생들의 참여는 저조하다. 특히 2학기에는 학사 일정상 학과마다 실습이나 국가고시 등 바쁜 일정으로 인해 모집인원을 모으는 것이 쉽지 않다. 모집하고 나면 끝이 아니다. 집단 회기마다 학생들이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해줘야 하는데 이 역시 쉽진 않다. 10월 초에 했던 특강은 40명이 모집정원이어서 겨우 모았는데, 특강 당일 사전 연락 없이 절반이 불참하여 나는 반쯤은 혼이 나간 상태로 긴장 속에 겨우 프로그램을 마칠 수 있었다.
사업을 할 때에는 사업에 배정된 사업비를 써야 하는데, 사업비를 쓰고 처리하는 과정 역시 긴장의 연속이다. 어제는 내가 처리한 회계 서류가 잘못되어 두 번이나 되돌려 받았다. 학생상담센터는 업무 특성상 본관과 떨어져 있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눈알이 빠질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만, 갑자기 처리 절차나 양식이 바뀌는 것은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치라 하면 고치는 수밖에.
사업에 따르는 성과와 실적을 수치화하여 계획하고 중간결과를 보고하고 매번 다른 부서에서 요구하는 양식에 맞춰 보고서를 내는 일 역시 매우 자주 해야 하는 일이다. 내라고 하면 내는 수밖에. 이 역시 특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다. 상담사라고 해서 학생 상담만 하고 기껏해야 상담일지만 쓸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요즘 대학교는 예전처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나라의 예산을 받아 운영되므로 그에 맞는 성과를 내야 하고 요구되는 증빙 서류 역시 꽤 엄격한 편이다. 이렇듯 대학원에 가서 공부와 수련을 거쳐 졸업장과 자격증을 겨우 취득하고 센터에 입사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현실은 실적을 내야만 하는 각종 사업을 떠맡게 되는 일이다.
대부분 상담사들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상담이 하고 싶어 상담사가 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전임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상담에 비해해야만 하는 사업에 따르는 일들이 훨씬 많다 보니 전임으로 오래 일하고 싶어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적어도 내 주변을 보면 그랬다.) 나 같은 경우는 재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내 성격상 자극추구보다 위험회피가 높은 편이라 매번 사업을 진행할 때마다 너무 긴장을 해서 피로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는 올까. 내가 맡은 사업이 끝나면 느끼는 성취감도 그다지 없다. 그저 얼른 내 손에서 떠났으면 할 뿐, 이제 끝냈다는 시원함 뿐.
프리랜서로 일할 때에는 상담과 프로그램 진행만 했으므로 모집이나 성과, 실적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학생들과 프로그램의 내용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임으로 일하게 된 지금은 사실 내가 맡은 프로그램이 무사히 얼른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맡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예전보다 더 일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이번주에 내가 맡은 집단 프로그램이 끝났다. 마지막 회기가 끝났고 나는 프로그램이 끝났다는 후련함을 느끼면서 학생들이 작성하고 간 소감문을 한 장씩 넘겨보았다. 학생들이 쓰고 간 소감문에는 말로는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감과 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묻어 나와 있었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가 하는 일은 실적을 내야 하는 일이 아닌,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는 시간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제는 개인상담이 세 건 있었다. 커플이 와서 TCI검사 해석상담을 받고 갔다. 커플 중 한 명은 내가 작년 초에 개인상담을 했던 학생이어서 훨씬 건강해진 모습으로 연인과 함께 검사를 받으러 와서 너무나 반가웠다. 한 명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불편감을 토로하여 왜 불편한지에 대한 근원을 함께 찾아보고 어떻게 생각을 바꾸면 좋을지에 대해 나누었다. 마지막 한 명은 현재 처한 힘든 상황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 주었다. 상담을 할 때마다 느끼지만 나는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아닌 상처받고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를 만나는 것만 같다. 그래서 겉모습은 성숙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꼭 아이 같아 더 애처롭게 느껴진다.
예민한 기질을 가진 나는 상담을 할 때마다 감정 이입을 잘하는 편이다. 그러나 상담사로서 내담자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만나며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나도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때론 거리 유지에 실패해서 어떤 회기는 스스로 상담이 망했다고 좌절하기도 하고 자책하기도 한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내담자의 고통스러웠던 삶 속으로 함께 들어가게 되어 내담자의 고통을 같이 느끼게 되므로 심리적으로 힘든 경험을 늘 하게 되는 것 같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고, 오히려 돈을 많이 써야 하는 직업이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 애정과 연민이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 상담을 업으로 삼아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 보인다.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초심상담사지만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이 일을 추천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이 일은 인간을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일이며, 때론 타인의 상처를 통해 내 안의 상처도 치유되는 경험도 하게 한다. 힘든 만큼 분명 보람 있는 일이고 나 자신을 성장시켜 준다는 점에서 특히 매력을 느낀다. 언제까지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맡아하고 있는 싫고 좋은 모든 일들이 나의 오늘을 만들고, 오늘이 쌓여 미래의 내가 될 것임을 믿기에 그저 묵묵히 걸어가 본다.